0.08%~0.2%에 해당하는 합병증

아이들을 만나기까지(여덟 번째 이야기)

by 옥민혜

그렇게 길을 잃은 사람처럼 방황하며 그 해 봄과 여름을 보냈다. 그 사이 지인 추천으로 또 다른 한의원에 가서 3번의 한약을 지어먹었다. 그 한약을 먹는 중에도 참 우여곡절이 많았다. 하지만 너무나 길고도 슬픈 이야기라 이렇게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기억은 글로 쓰이기를 거부하고 있다.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은 가을이다. 가을이 되면 우리는 매 년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지금에 와서 쌍둥이 육아로 정신없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노라면 그때의 추억들이 현재를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 여행에는 그런 힘이 있다.


세 번의 한약을 먹는 동안 쉬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나는 더 지쳐버렸고, 그 해 가을 우리는 여행을 갔다. 마치 천국에 온 것 같이 모든 것이 아름다웠던 나라, '크로아티아'. 여행 비수기여서 우리는 한적하고 여유롭게 그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크로아티아의 '크르커 국립공원'은 요정이 살 것만 같은 신비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웅장하고 거대한 폭포수의 위용에 압도되어 숨 초자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감히 카메라를 갖다 대면 불경스러울 것만 같은 초자연적인 아름다움 앞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손에서 떼지 않고 들고 다니던 카메라도, 핸드폰도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저 한 없이 폭포수를 바라보았다. 자연 앞에 인간은 이토록 무력한 존재다. 그 경이로움을 마주하고 있자니 지금껏 내가 아등바등거리며 지내왔던 시간들이 참 하잘 것 없이 느껴졌다. 그 여행은 내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나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2차 시험관에 들어갔다. 방황의 시간이 꽤 길었다. 시험관 시술을 하다 보면 누구나 이런 시기가 있다. 앞 만 보고 질주하는 경주마처럼 쉬지 않고 도전하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거듭되는 실패에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 채 그곳에 혼자 들어가 외롭게 지내는 시간들도 있다. 그 공간에는 남편도, 친구도, 부모님도 들어올 수 없다. 오직 나 혼자서만 모든 짐과 서러움을 감당하는 것이다. '왜 나에게만 생기지 않는 것일까', '이 고통의 시간은 과연 언제 끝이 날까'. '끝이 나기는 하는 걸까' 그런 생각들에 사로잡혀 헤어 나올 수 없는 시간들을 거친다. 그 기나긴 외로움과 자책의 시간은 누구도 개입할 수 없다. 오직 스스로 극복하는 것만이 그곳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시험관 시술에도 장기, 단기, 저자극, 자연주기 요법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이 중에 어떤 요법을 시행할 것인지는 난소나 자궁의 상태, 시험관 차수 등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저번에 단기요법으로 했는데 결과가 안 좋았다면 이번에는 장기로 해보자는 식의 의사의 판단에 따라 이루어지기도 한다. 무엇이 가장 적합한 요법인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내 경우에는 장기, 단기 요법을 두루 시도했었는데 어떤 요법을 사용했는지가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던 것 같다.






2차 시험관에서도 똑같이 22개의 난자가 채취되었다. 1차 때와 똑같이 채취를 하고, 그때와 똑같은 '통증'을 느끼며 마취에서 깨어났다. 너무 아파서 간호사를 불렀다. '제발 진통제 좀 놔달라'라고 애원했다. 역시나 합리적인 이유를 대며 거절당했다. 통증은 점점 더 심해져 갔고, 나는 의식을 잃었다 깨었다를 반복하며 그저 '아프다'는 말만 반복했다. 간호사가 다가와 통증이 점점 심해지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잠시 후,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다시 시술 방으로 옮겨졌다. 의사가 다가와 초음파를 보기 시작했다.


"난소에서 약간의 출혈이 보이는데요, 병원에 계시면서 출혈이 멎는 것을 확인하고 귀가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난소 출혈. 난임 전문병원 대기실에는 시험관 시술에 대한 안내 책자가 꽂혀있다. 시험관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 시술 과정, 종류, 등에 관한 설명과 함께 마지막에 '부작용과 합병증'에 대한 부분도 안내되어 있다. 거기서 본 적이 있다. '난소 출혈'이라는 것을.


난자 채취 시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 : 난소를 바늘로 찔러 난자를 채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약간의 출혈이 발생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소량 출혈이며, 이는 저절로 지혈되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간혹 지혈이 잘 되지 않아 배 안에 피가 고이게 되는 경우에는 난자 채취 당일 오후부터 어지럽고, 복부 통증이 아주 심할 수 있다. 이렇게 배 안에 피가 고이는 경우에는 입원하여 수액 치료를 받거나, 드물게는 복강경 수술을 통해 지혈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복강 내 출혈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는 0.08~0.2%에 불과하기 때문에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


부작용과 합병증에 대한 안내서에는 그렇게 적혀있었다. 그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야 나는 내가 0.08~0.2%에 해당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오전 9시가 채 되기 전에 병원에 가서 난자 채취를 하고, 출혈이 발견되어 그것이 지혈되기를 기다리기까지 진통제도 없이 그 통증을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 오후 5시 무렵, 다시 한번 초음파를 보았고, 통증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나 의사는 '이제 출혈이 멈췄으니 집에 가도 좋다'라고 했다. 그리고 혹시 만에 하나 집에 가서도 통증이 나아지지 않고 점점 더 심해지면 밤늦게라도 좋으니 전화를 달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이미 저녁 시간을 넘겨 있었다. 남편과 나는 그 날 한 끼도 먹지 못했다. 나는 통증 때문에 식욕조차 느낄 새가 없었지만 남편은 적잖이 배가 고팠을 텐데 그 역시 아무것도 먹지 않고 내 곁을 지켰다. 그 날 남편은 대학교 동창들의 송년회 약속이 잡혀 있었다. 나는 남편이 나 때문에 그런 모임에 빠지는 것이 싫었다. 늦게라도 가서 오랜만에 좀 즐기다 오라고 남편을 보냈다. 썩 내켜하지 않았지만 1년에 한 번 있는 모임이니 남편도 재차 내가 괜찮은지를 묻고는 마지 못 해 집을 나섰다.


통증은 계속되었지만 의사가 말해 준 '통증이 더 심해지면'이라는 기준이 모호했다. 채취 후 마취에서 깬 순간부터 그때까지 계속 아팠지만 그게 더 심해지고 있는 건지, 그대로인 건지, 지난번 1차 때도 이 정도로 아팠었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아파야 의사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 걸까. 내가 다니는 병원에는 입원실이 없었다. 저녁에는 모두가 퇴근을 하고 병원에는 아무도 없다. 혹시라도 밤늦게 문제가 생기면 나는 응급실로 가야 했다. 통증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건 모임에 갔던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였다. 앉아있으면 그나마 견딜 만했으나 눕는 순간 호흡곤란이 왔다. 너무 아파서 차마 소리조차 지를 수 없는, 숨조차 쉴 수 없는 통증에 이건 분명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시계는 새벽 1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급하게 119를 부르고 남편은 시술 담당의에게 문자를 보냈다. 10분 만에 구급차가 도착했고 나는 들것에 실려 나갔다. 들것에서도 누울 수가 없었다. 눕기만 하면 숨을 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구급대원은 나를 구급차에 태운 뒤 자연스럽게 뒤로 눕혔고, 그 순간 나는 비명을 지르며 내가 알고 있는 욕이란 욕을 모두 퍼부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행히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학병원이 있다. 그 곳 응급실로 바로 들어간 나는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고, 통증의 경위를 설명하자 곧바로 중증환자로 분류되어 응급의학과와 산부인과 의사가 번갈아 나타나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응급실에서 다시 초음파실로 옮겨졌고, 신중하게 초음파를 확인하던 당직의는 '난소 출혈이 계속되고 있으며 이미 복강 내 피가 가득 고여있다'는 얘기를 했다. 당장 입원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도 했다. 그렇게 입원 수속을 하고, 몇 가지 검사를 더 거친 후 새벽 5시가 넘어서야 나는 병실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제야 진통제도 한 대 맞았다. 한 결 나았다. 하루 종일 한 끼도 먹지 못한 채 통증과 싸워야 했던 나는 온몸에 진이 다 빠져 있었고, 지금 이 것이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구분이 안 갈 만큼 정신이 몽롱했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병실 한 편에서 뒤로 눕지도 못하고 앉은 채로(심한 통증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누우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창 밖을 내다보았다. 멀리 대로변으로 이따금씩 차들이 지나갔다. 고요하고 어두운 병실,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들, 그리고 통증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시간들, 내가 진통제 좀 놔달라고 애원하고 있을 때 내 옆 침대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던 사람(채취 후에 그렇게 코를 골며 잘 만큼 전혀 통증 없이 태평한 사람들도 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때의 기억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육아를 하면서 얼마 간 잊고 지냈던 그때의 기억들을 다시 끄집어내어 글로 옮기는 작업은 그렇게 녹록지 않은 일이다. 분명 모두 지나간 일이지만 글을 쓰면서 나는 그때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게 된다. 그리고 가슴 언저리가 뻐근해지고, 한 없이 먹먹해짐을 느낀다.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그때의 나로 완전히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완벽히 돌아가지 않고서는 이 글은 절대 쓰여질 수가 없는 것이다.


다른 환자들이 곤히 자고 있는 숨소리만이 들리는 어두운 병실에서 진통제를 맞고 그제야 통증이 줄어든 나는 '이제 살았다'라는 생각을 했다. '살아서 좋은지 나쁜지'는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죽었으면, 이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0.08%라. 나의 삶은 늘 그래 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간이침대에 쭈그리고 누워있는 남편을 보자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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