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된 당신에게
병원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아이를 낳고나서 다녔던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상당히 여러 가지의 검사를 실시했다. 어느 날은 '가족의 모습'을 그려오라고 했다. 주어진 미션은 단지 그뿐이었다. 나는 숙제가 밀린 아이처럼 과제를 미루고 미루다가 진료 전날 밤에 마지 못 해 검사지를 꺼내 들었다. 이미 비용을 지불했으니 안 해 가면 내 손해였다.
가족이라. 보통의 심리 테스트가 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깊이 생각하면 안 된다. 그냥 바로 생각나는 대로 답을 말하는 것이 맞다.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그렸다. 사람의 형태라고는 얼굴과 몸통과 팔, 다리가 전부인 아주 유아적 수준의 그림이었다. 아이들은 거실에 앉아 블록 놀이를 하고, 나는 그 옆에서 청소기를 돌리고, 남편은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그림.
진료를 가면 늘 의사는 2m쯤 거리를 두고 앉아 '지금 생각나는 대로 하고 싶은 얘기를 하세요.'라고 한다. 처음에는 이 얘기 저 얘기 꽤 많은 이야기들을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 얘기거리들도 점점 곤궁해졌다. 급기야 하고 싶은 것인지 아닌지도 모를 이야기들을 쥐어짜서 말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갈수록 의아해졌다.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어지자 나는 의사 앞에 놓여 있는 내 검사지를 분석해 달라고 했다. 내가 그린 가족의 그림에 대해서.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의사는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말했다.
"특별한 점은 없지만.... 한 가지 재밌는 건, 보통 가족의 그림은 아내가 요리를 하고 남편이 청소를 하는데 이 그림은 그게 반대네요. 이렇게 그리신 이유가 있을까요?"
보통의 가족과 반대인 우리 가족의 모습. 보통이라는 것이 뭘까. 평범하다는 것이 뭘까. 나는 이상한 사람인 걸까.
나는 전업주부이지만 요리를 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나도 요리를 했었다. 반드시 아침밥을 먹어야만 하는 남편이었기에, 그것도 뜨끈한 국이 밥상에 꼭 있어야 하는 남편을 위해 나는 늘 종류를 바꿔가며 국을 끓였다. 진수성찬이라고 까지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제법 구색이 갖추어진 아침 밥상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차려냈었다. 남편을 위해 요리하는 것이, 그것을 맛있게 먹어주는 남편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외출을 했다가도 해 질 무렵이 되면 남편의 저녁 식사를 차리기 위해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남편의 끼니를 챙기는 것이 나에게는 꽤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그러던 내가 임신을 하고 입덧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요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는 입덧 때문에 요리를 할 수 없었던 것일 뿐 일부러 요리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나서는 요리를 할 시간이 없었다. 친정엄마와 둘이서 아이들을 돌보는대도 하루에 한 끼를 제대로 챙겨 먹기가 쉽지 않았다. 대충 빵을 주워 먹거나, 컵라면을 먹거나, 배달 음식을 시켜 허겁지겁, 먹는 둥 마는 둥 허기만 채우는 수준으로 몇 달을 살았다. 먹는 것보다 자는 것이 더 절실한 시절이었다.
나는 모유수유를 거의 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병원 인큐베이터에 있고, 나 혼자 조리원에 있을 때 조금이라도 모유를 먹이기 위해 열심히 유축을 해서 병원으로 배달을 다녔다. 2박 3일 만에 퇴원을 하고 수술 부위가 아물지도 않은 상태에서도 열심히 유축을 했고,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병원을 매일 오갔다. 모유의 양은 너무나 적었고 그나마도 둘이서 나눠 먹어야 했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과 상봉한 이후에도 너무 작아서 스스로 젖을 빨 수 없는 아기들에게 나는 매번 유축을 해서 모유를 먹여야 했는데 쌍둥이 엄마에게 3시간마다 30분씩 앉아서 유축을 할 여유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스스로 모유를 먹을 수 없는 아이들과, 유축을 할 시간이 없는 나 때문에 더 이상의 모유 수유는 불가능해졌다. 겨우 한 달간 간신히 분유와 모유의 혼합수유를 한 것이 내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모유를 좋아했던 작은 아이는 분유를 거부했다. 당시에는 그걸 몰랐다. 도대체 왜 먹지않고 울기만하는지를. 분유 먹기를 거부하며 하루 종일 울기만 하는 아이를 들쳐 업고 응급실로 달려갔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우리 아이들은 그야말로 '잘 안 먹는 아이들'이었다. 이 정도 개월 수면 하루 평균 분유 몇 ml는 먹어야 한다는 기준이 있는데 우리 아이들은 그 반의 반도 채우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은 먹지 않는데 나만 먹는다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이유식을 시작할 때만 기다렸다. 너희들은 분유가 싫은가 보구나. 그럼 이유식은 좋아할까. 그런 기대가 있었다.
드디어 아이들이 이유식을 시작하게 되어 각종 조리도구들을 샀다. 모유를 제대로 먹이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던 나는 이유식만큼은 손 수 만들어 먹이고 싶었다. 열심히 인터넷을 검색해 가며 시기별로 먹어야 하는 것들과 재료들을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유식도 먹지 않았다. 입에 넣어주는 족족 뱉어냈고, 억지로 먹이려 들면 죽는다고 울어댔다. 뱉어내면 집어넣고, 또 뱉어내면 다시 집어넣고, 아이는 울고, 그러다 나도 따라 울었다. 잠잘 시간을 쪼개가며 몇 시간에 걸쳐 공들여 만든 이유식은 모두 하수구에 버려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유아식을 시작할 때만 기다렸다. 유아식은 좋아하겠지. 그렇게 기대했다.
돌이 지나자마자 서둘러 유아식을 시작했다. 각종 카페에 가입하고 블로그들을 검색하며 아기들이 잘 먹는 반찬, 핑거푸드 등의 정보를 얻었다. 이렇게도 만들고, 저렇게도 만들고, 한 여름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간절함과 정성을 담아 다양한 시도를 했다. 그러나 그 노력이 무색하게 나의 음식들은 모두 거부당했다. 숟가락을 가져다 대면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억지로 먹이려 들면 또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한 숟갈이라도 먹이려는 나와, 절대 먹지 않으려는 아이들 사이의 전쟁. 언제나 패배자는 나였다. 울면서 손 수 만든 음식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처넣을 때의 그 비참함. 그때의 기억들이 나에게는 여전히 강한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그러고 보니 뱃속에서부터 크지를 않아 애를 태웠던 아이들이었다. 낳아서도 또래보다 작은 것은 물론이고, 기어 다니는 아기들보다도 훨씬 작고 왜소한 아이들을 보면 속에서 천불이 났다. 그래서 나는 더 먹이려고 애썼고, 아이들은 엄마 마음도 모르고 더욱 먹지 않으려고 했다. 먹는 것으로 인해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적이 되어갔다.
큰 아이보다 작은 아이의 거부가 더 심했는데 어느 날은 이대로는 안되겠다싶어 아이를 유아 의자에 앉히고 벨트를 채운 채 강제로 입에 쑤셔 넣었다. 아이는 안 먹겠다고 뱉어내며 울기 시작했고, 악에 받힌 나는 뱉어내면 밀어 넣고 뱉어내면 또 밀어 넣기를 반복했다. 어떻게든 한 숟가락이라도 먹이고 싶었다. 밥이라고는 3일 동안 한 톨도 먹지 않은 아이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그 서슬에 놀란 아이가 의자에 묶인채 토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앉은 채로 설사를 해 버렸다. 남편이 내게서 아이를 뺏어갔다. 아이는 진정이 되었지만 나는 끝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아이를 따라다니면서 입에 넣기 시작했다. 그러면 아이는 또 뱉어냈다. 그제야 나는 다 포기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서러운 울음을 울었다.
"나 쟤 때문에 너무 불행해. 쟤만 없었으면 행복했을 거야. 엄마네 데려가서 쟤 키우라 그래. 쟤 떄매 너무 불행해!!"라고 말하며 소리 내어 울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 아이가 듣는 앞에서.
나의 육아 우울증은 심각했고, 먹지 않는 아이들로 인한 스트레스는 날로 심해져 갔다. 영유아 검진을 할 때마다 키도, 체중도 늘 하위 1%에 머무는 아이들. 그런데도 먹는 것을 거부하는 아이들. 그때부터였다.
내가 요리를 하지 않기 시작한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