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유럽 국가엔 주류 구매 제한 시간이 있고, 로포텐도 예외는 아니었다
람베르 해변에 머무는 첫날, 이렇게 멋진 바다가 펼쳐진 캠핑장에서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맥주 생각이 저절로 났다. 캠핑장 안 따뜻한 공용 주방에 마련된 식탁에 앉아 맥주를 곁들인 저녁을 먹는 것만큼 사치스러운 한 끼가 어디 있을까. 텐트 전실에 작은 스토브를 세워 놓고 마치 소꿉장난하듯 겨우겨우 음식을 해 먹는 것에 비해선 정말 편한 일이다. 누번(Nubben) 등산을 마치고 해변을 거닐며 쉬다가 맞이한 저녁 시간, 버스 정류장 바로 근처에 있는 마트를 찾았다.
번프리스(Bunnpris). 노르웨이 체인 슈퍼마켓인 이곳이 람베르에서 유일한 마트였다. 하지만 그 규모만큼은 여느 대형마트 못지 않았다. 마을 인구는 적지만, 여행자들이 많이 모이기 때문일까. 나는 그 큰 마트를 탐방하듯 돌아다니며 ‘오늘은 뭘 해먹을까’하는 즐거운 고민과 함께 쇼핑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내내 생각했던 맥주도 노르웨이 산으로 한 캔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을 때 오히려 그르치케 되는 경우가 이런 때일까. 쇼핑을 마치고 장바구니를 들고 호기롭게 계산대를 향해 가는데,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시계를 보니 오후 8시 무렵이었다. 일단은 그대로 맥주를 챙겨 계산대로 갔다.
불길한 생각이 든 건 다름아닌 맥주를 구매하는 데 제한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유럽 국가에선 음주로 인한 여러 사고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슈퍼나 마트에서 주류를 구입할 수 있는 시간에 제한을 둔다(펍이나 레스토랑에서 마실 땐 상관이 없다). 국가마다 시간이 상이하지만 보통 평일에는 저녁 시간대, 주말에는 낮 시간대까지 가능하다. 내가 지냈던 리투아니아의 경우 평일과 토요일에는 오후 8시까지, 일요일에는 오후 3시까지 구매가 가능했다. 그래서 맥주를 사 마시고 싶을 때면 늘 이 제한 시간을 신경써야 했다.
노르웨이 역시 이와 같이 제한 시간이 있다는 걸 미리 알았다. 평일에는 리투아니아와 마찬가지로 오후 8시까지, 토요일에는 오후 3시까지 구입 가능하며 일요일에는 아예 판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하지만 난 너무나 당연하게도 오늘이 평일이고, 하늘은 대낮처럼 환하니까 구입할 수 있을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완전한 백야를 경험하는 건 처음인데다 버스나 배를 탈 때를 빼곤 시간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여행이다 보니 자연스레 시간 개념에 둔감해졌던 것이다.
오후 8시에서 몇 분은 이미 더 흐른 시간, 그래도 '혹시나'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다른 제품과 함께 맥주를 슬쩍 계산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맥주 캔의 바코드를 찍을 차례가 왔을 때, “혹시 시간 지났을까요?”라고 점원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돌아오는 답은 뻔했다. 젊은 남자 점원은 맥주를 계산대 옆으로 따로 빼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예상은 했지만, 내심 아쉬웠다. 그래도 맥주를 집은 건 8시 이전이라 어떻게 안 될까 싶었다. 그러나 점원이 봐 주고 싶어도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계산 자체를 못 하게 시스템에도 일종의 장치가 걸려 있을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규정은 규정이고, 내일이 있으니 저녁 거리만 사서 마트를 나왔다. 맥주 한 캔을 손아귀에 넣었다가 떠나 보내는 게 이리도 씁쓸한 일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