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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규호 Aug 27. 2023

로포텐 2일차-3. 외딴 바다 부네스해변에서의 하룻밤

자연에 오감을 쏟게 되는 곳에서 백패킹의 로망을 이루다

빈스타드(Vindstad)로 가는 작은 여객선에는 꽤 많은 승객이 탑승했다. 배는 흐린 날씨 속에서 파도를 가르고 헤쳐나갔다. 배는 몇 군데에 들러 사람들을 내려주고, 마침내 빈스타드에 도착했다. 빈스타드에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사람들이 내릴 줄 알았는데, 나를 포함해 단 두 명만이 하선했다. 함께 내린 다른 한 명은 별다른 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야영하러 가는 것 같진 않았다. 이 시점에 해변에 야영하러 가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다시 배가 떠난 이곳에는 적막함만 남았다.

빈스타드 선착장에서 바라본 로포텐 풍경

선착장의 목조 다리를 빠져나갈 때쯤, 웬 작은 건물 앞에 오렌지색 옷을 입은 풍채 좋은 주민을 마주치며 정적이 깨졌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대화를 주고 받았다.



“해변에 야영하러 가나요?”

“네, 도전하러 갑니다!”


나는 웃으며 결연하게 대답했다. 그러더니 그는 뒤로 돌아 한 건물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만약 야영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저쪽에 보이는 오렌지색 건물로 오세요. 제 집이거든요.”

“오 정말요?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행운을 빌게요!”


나는 따봉 한 발을 보내며 짧은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러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조용해졌다. 이곳 빈스타드는 (섬 속의)섬은 아니지만, 차도 들어오지 못하는 오지 중의 오지이다. 주변 산세가 험해 선착장에서 부네스(Bunes) 해변 앞까지 잇는 작은 길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도로가 없다. 험한 산을 넘어서 오지 않는 이상, 배로만 들어올 수 있는 지역이다. 그 말은 곧 하루의 마지막 배가 떠나고 나면 사실상 고립된다는 뜻이다. 다음날 첫 배가 오기 전까지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식료품 가게나 편의시설이 없기 때문에 레이네에서 미리 구입을 했다.(그나마 선착장에 작은 카페가 있다.) 여행 첫날처럼 악천후가 갑자기 찾아온다던가, 혹시나 야영을 하다가 내 몸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이곳에선 마땅히 해결할 방법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배에서 내려 마주친 한 주민이 건넨 말은 말로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도 내가 그의 집을 찾아간다는 건 여정에 어떤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이니, 도움을 받을 일이 없길 바랐다.

그 분은 마치 RPG게임 속 NPC처럼 선착장 앞에 서서 내게 말을 건넸다. 


본격적으로 빈스타드에서 부네스 해변을 향해 걸어갔다. 바닷가로 가려면 언덕을 넘어야 하는데, 그전까진 평탄한 길이 이어졌다. 빈스타드 마을은 굉장히 고요했다. 처음에 만난 주민을 빼면, 가는 동안 그 누구도 마주치지 못했다. 집이 몇 채가 없어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너무 아무도 없으니 사람이 사는 마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부네스 해변 방향, 멀리 언덕 너머에 바다가 있다.


빈스타드 선착장 방향, 고요한 만과 로포텐의 산세가 어우러져 절묘한 풍경을 자아낸다.

얼마간 걸었을까. 안으로 옴폭 들어간 만을 따라 따라 띄엄띄엄 자리잡은 집들 뒤로 언덕이 보였다. 처음 언덕을 마주한 순간, 저 뒤에 해변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저길 넘어가야 한다는 것도 거짓말같았다. 그렇게 높은 언덕이 아닌데(약 80m), 거대한 봉우리를 마주한 것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언덕이 가파르고 주변이 트여 있는 형태라 그 높이가 더 돋보여서 그런 것일까. 로포텐에 입도 후 배낭을 메고 대체로 평탄한 길만 걸었으니 더 어렵게 느꼈던 건지도 모르겠다. 


언덕 가까이에 가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 좁은 흙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 길을 따라가면 부네스 해변이 나온다고 팻말도 꽂혀 있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산책로를 따라 언덕을 올랐다. 땅만 보고 헉헉대며 오르길 15분. 고지가 눈 앞에 보였다. 언덕 꼭대기를 넘어가자 광활한 바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때묻지 않아 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해변의 삼면이 첨예하고 굴곡진 바위산과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어, 사람의 발길이 쉽게 닿기는 힘든 곳이다. 그래서일까. 정말 외딴 곳에 있다는 기분이 느껴졌다. 

좁은 흙길을 따라가면 언덕 뒤에 숨은 부네스 해변이 나타난다.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은 다소 가파르고 위험했다. 빈스타드에서 언덕 꼭대기까진 정해진 산책로가 있는 반면, 바다로 이어진 길은 온통 돌과 바위라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바닷가에 내려가자 땅이 너른 정도가 더 크게 느껴졌다. 잔디밭도, 모래사장도 한없이 넓어 보였다. 적당히 평평한 잔디밭 위에 텐트를 치고, 주위를 둘러봤다. 언덕 꼭대기에서 바다를 볼 때 아무도 없어 보였는데, 바닷가에 내려와서 보니 확실했다. 배에서 내렸을 때 봤던 것처럼, 이 바다엔 나 혼자였다. 부네스 해변은 그래도 사람들이 얼마큼 찾는 바다이고 야영지로도 인기가 있다고 하는데, 아직 쌀쌀한 때라 그런지 아무도 없었다. 이 넓은 바다에 나 혼자 있다니 기분이 묘했다. 바닷가엔 자연하게 볼록 솟은 모래언덕이 가득하고 주변엔 거친 산들이 솟아 있다. 날 것 그대로인 모습이었다. 언덕을 넘어오는 동안 스마트폰에 안테나도 점점 줄어들더니 통신 불가 표시가 떴다. 마치 원시시대에 들어온 것 같았다.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은 가팔라서 주의해야 한다.
물이 고인 모래사장에 하늘이 투영되어 마치 '우유니 사막'같은 분위기가 났다.

이제 생존을 위한 물을 구해야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텐트를 친 곳에서 왼쪽으로 떨어진 곳에 산꼭대기에서 물이 흘러내려오는 게 보였다. 고민하지 않고 그곳으로 향했다. 물이 흐르는 곳까지는 꽤 거리가 멀었다. 텐트가 손톱만하게 정도였다. 생각보다 먼 거리에 왠지 길을 잃은 것 같은 이상하고 오싹한 기분도 들었다. 서둘러서 움직였다. 흐르는 물에 생긴 진흙을 밟고 미끄러지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으나, 다행히 바지 끝단과 신발 정도만 젖었다. 바위틈에서 흐르는 물을 길어 온 다음에는 휴대용 정수필터로 걸러 식수로 썼다. 그 물로 미리 사온 라면도 끓였다. 작은 라면인데도 소세지와 양파를 함께 넣으니 조그만 코펠이 거의 넘치기 직전까지 차 올랐다. 쌀쌀한 바람이 부는 해변가에서 따뜻한 라면을 먹으니 추위가 삭 달아났다. 맛은 두말할 것 없었다. 소시지와 양파로 영양가도, 든든함도 잡았다. 내가 산 라면이 미스터 리 라면인데, 뒤늦게 알고보니 과거에 노르웨이에 거주하던 한국인 이철호 씨가 개발한 것이었다. 현지인들의 입에 맞게 맛을 개발했겠지만, 스프가 닭고기 베이스라 한국인 입맛에도 딱 맞았다. 자극적인 맛을 크게 즐기지 않는 나에겐 속 편히, 부담없이 먹기 좋았다.

백패킹을 하며 먹는 라면만큼 맛있는 라면은 없다.


배를 채우고 나자 주변 풍경에 다시 눈길이 갔다. 아무도 없는 해변에선 무얼 해야 할까. 해가 지기 전에 옆에 보이는 산에 올라볼까 생각하고 기슭을 배회했다. 하지만 등산로가 어딘지 찾지 못했고 산세도 제법 험준해 보여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 산 위에서 보는 풍경도 정말 장관이지만, 현재 내 수준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사진으로만 만족했다. 다시 내려와선 텐트 주변 모래사장을 거닐고 주변 풍경을 감상했다. 자연이 만들어낸 기암괴석과 험한 바위산을 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 구름 사이로 드러난 파란 하늘 아래 틈틈이 새어 나오는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첫날 겪었던 비바람과 흩날리던 싸락눈을 생각하면 자연에 절로 공손해지고 한없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바다라고 텐트가 빠르게 펄럭거릴 정도로 바람이 불었지만, 날이 크게 흐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야영을 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텐트 안으로 들어오던 한기는 첫날보단 확연히 줄어들었고, 내내 밝은 하늘이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텐트에 누워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니 먼발치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파도는 일정한 간격으로 철석거리며 귓가에 속삭이듯이 들어왔다. 사람들도, 갈매기도 없어 자연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를 빼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아 작지만 명료하게 들렸다. 전날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기 때문이었을까. 구름을 뚫고 텐트로 비쳐오는 햇빛에도 곤히 잠들었다. 그날의 파도 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장가였다. 내가 바라던 '백패킹의 로망'이 이루어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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