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7시, 나는 우즈베크 국경을 바라보며 한없이 읊조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쩌려고 여기까지... 물 흐르는 대로 흘러온 내 인생이었다. 대학도, 취직도, 결혼도 모두 흘러들어온 인연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퇴사 후 키르기스스탄의 풍요로운 자연에서 1달 살기 힐링여행만 하려다, 어쩌다 보니 우즈베키스탄 국경을 넘게 되었다. 우즈베키스탄, 20대의 내가 미친 듯이 오고 싶었으나, 언제부터인가 절대 가지 말아야 할 나라로 분류된 나라. 한국에서 출국할 때만 해도 우즈베키스탄 여행은 준비해 본 적도 없다.
5분 만에 결정된 우즈베키스탄 행이었다. 키르기스스탄에 초대해준 성제오빠가 우즈베키스탄에 간다고 하자, 친정엄마도 덩달아 "중앙아시아까지 왔는데, 우즈베키스탄 안 가면 아쉽지."라고 하셨고, 결정력이 약한 나는 이번에도 휩쓸리듯 따라왔다.
너무 오래된 과거였다. 기억도 안 나는 과거로 내가 회피할 필요가 있을까.
키르기스스탄 비쉬케크에서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로, 그것도 버스로 가는 여정은 매우 복잡하다. 가장 빠른 루트가 카자흐스탄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여권에도 도장이 쾅쾅 4개나 찍힌다. 키르기스 출국, 카자흐 입국, 카자흐 출국, 우즈베크 입국, 그 각각의 절차를 어마어마한 줄을 통과해야 찍을 수 있다. 내가 가져온 모든 짐과 함께. 애써 버스에 실어놓았던 짐들을 모두 내려서 국경심사대 X레이 검사를 통과시키고 다시 버스에 실어야 한다. 작은 짐이건 큰 짐이건 다 내려야 한다. 대형 백팩, 내가 마셨던 물, 에코백, 아이와 엄마의 수면 목베개, 모자, 외투 등을 모두 내려서 버스를 텅텅 비워야 한다. 그리고 내린 짐은 내가 스스로 모두 짊어진 채로 국경을 걸어서 통과해야 한다. 게다가 우리는 유아차까지 있지 않은가?
키르기스에서 우즈베키스탄 가는 버스루트
키르기스스탄 버스터미널에 도착하자, 우리와 함께 장장 12시간 밤새도록 국경을 넘을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저귀 갓 뗀 주원이가 과연 밤샘버스를 소화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5살짜리 버스 마니아는 대형버스를 타게 되었다고 싱글벙글거리고 있었다.
비쉬케크 버스터미널을 출발한 지 2시간 만에 키르기스스탄 국경에 도착했다. 이 국경을 넘으면 카자흐스탄이다. 국경 근처에 도착하자, 운전사 옆에 앉은 버스 관리요원 아저씨가 일어나, 엄청 큰 목소리로 훈계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내용인지 현지인들이 아저씨에게 열성적으로 질문도 했다. 분명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내용 같은데, 국경을 여러 번 넘어본 성제오빠는 맥북만 바라볼 뿐, 나에게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통역해주지 않았다.
국경심사 사무소에 인접하여 버스 문이 열리니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버스에 있는 짐을 모두 내렸다. 마시던 물병, 에코백, 그리고 엄마와 주원이의 목베개, 백팩 2개와 유아차까지, 짐이 순식간에 나를 덮쳤다. 거대한 짐들을 보면서 국경을 넘는 동안 나에게 초인적인 힘을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문득 여행할 때마다 항상 짐꾼이 되어주었던 남편이 그립고 또 그리웠다. 친정엄마는 카카오톡 단톡방에 자랑할 거리가 생겼다고 들떴다. 그런 엄마를 보자 나도 덩달아 행복해져짐을 살짝 비껴놓고 군인들을 피해 엄마와 주원이 사진을 찍어주었다.
키르기스스탄 국경
"카레이스키! 다와이! 다와이!(давай! давай!)"
국경사무소에 도착해 짐을 정리하는데, 어디선가 엄청난 고함이 들렸다. 아까 버스에서 키르기스어로 승객들을 향해 일장연설을 한 버스관리요원 아저씨가, 우리에게 연신 손짓하며 고함치고 있었다. 나도 아줌마라 눈치 백 단이었다. 손짓을 보니 '뒤에서 우물쭈물하고 너희들 뭐 해. 얼른 앞으로 와.'라는 느낌이었다. 성제 오빠는 침착하고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짐 챙겨서 줄 서자. 뒤에 또 버스가 오는데, 외국인인 우리가 미적미적되고 있으니까 아저씨가 출국이 늦어질까 봐 걱정하는가 보다."
일행 중 한 명이라도 늦어지면 전체가 늦어지니 아저씨가 재촉한 것이다. 나는 재빨리 짐을 모조리 메고, 남은 손으로는 유아차를 끌면서 줄 가장 끝에 섰다. 아저씨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뿌리고는 강한 제스처와 함께 외쳤다.
"카레이스키! 다와이! 다와이!"
우리는 외국인이라서 특별대우를 받고 싶지 않았다. 현지인들이 줄을 서야 하면 우리도 함께 순서대로 출국하고 싶었다. 그게 우리가 살아온 방식이고, 기본적인 에티켓 아닌가. 줄 끝에서 나는 제스처로 '아저씨 우리 여기 줄 섰다니까요?'라고 하자, 아저씨가 이번에는 우리를 직접 잡으러 왔다.
"카레이스키! 다와이!"
친정엄마와 주원이와 나는 현지인들 20여 명을 제치고 어느새 출국심사의 가장 우선순위가 되었다. 현지인들은 아저씨와 함께 대놓고 새치기하는 외국인이 당연한 양 길을 쉽게 비켜주었다. 성제 오빠는 아저씨의 '다와이' 대상이 아닌지 줄 끝에 서서 현지인들과 함께 출국심사를 받을 수 있었다. 성제 오빠와 우리는 20여분 후 다시 재회할 수 있었다.
"오빠, 왜 아저씨가 자꾸 우리를 앞에 서라는 거예요?"
"현지인들은 빠릿빠릿하게 하는데, 외국인이 잘 모르고 헤매다 전체가 늦어질까 봐 아저씨가 외국인만 미리 빼려고 하는 가보다"
아저씨가 하도 카레이스키 다와이를 자꾸 외치는 바람에, 가뜩이나 중앙아시아 사람들이랑 얼굴 생김새도 다른데, 현지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카자흐스탄 입국 사무소는 키르기스스탄에 비해 확연히 달랐다. 반지르르한 제복이 빛나는 군인들이, 야간근무인데도 외국인인 우리 여권을 보면서, 미소도 지어주었다. 우리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보면서 이렇게발음하는게 맞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카자흐스탄에 도착한 나를 놀래킨 건 다름아닌 콘크리트길이었다. 콘크리트 포장길이 많지 않은 키르기스스탄에 그새 익숙해진 탓이다. 흙길이 가득한 키르기스스탄에서는 돌에 맞아 앞유리가 깨진채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다니는 자동차가 많았다. 카자흐스탄의 검고 반듯하고 세련된 콘크리트 길을 보니, 키르기스고 우즈베크고 다 모르겠고, 그냥 카자흐스탄에 계속 있고 싶었다. 오늘 밤부터 내일 새벽까지는 카자흐스탄 도로에서 버스가 주행할 텐데, 이런 반듯한 길이라면 우리는 오늘밤 버스에서 숙면할 수 있을 것이다.
X레이 검사를 모두 통과한 짐들을 다시 챙겨서 카자흐스탄 입국 사무소를 떠나고 밖으로 나가니,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가 타야 할 버스는 자동차 줄에서 아직도 군인들의 심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가 올 때까지 모든 짐을 가지고 비를 피해야 했다. 비를 쫄딱 맞으며 거대한 짐을 메고 오는 '카레이스키'를 보자, 같은 버스에 탄 키르기스 아가씨가 우리에게 이리로 오라며 손짓했다. 아가씨는 국경을 넘는 데도 머리도 예쁘게 땋고, 실크 소재로 된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 버스에는 아가씨의 가족 7명이 함께 타고 있었다. 우즈베크에서 열리는 친척 결혼식에 가야 하기 때문에 온 가족이 총출동한 거란다. 성제 오빠는 나에게 저 사람들은 키르기스에 사는 위구르족이라고 했다. 성제오빠는 위구르에서 한동안 언어연수 목적으로 장기로 머무른 적이 있어, 위구르 문화에 대한 엄청난 애정이 있는데, 아가씨의 가족들은 성제 오빠에게 관심도 없으니 약간은 서운해했다.
카자흐스탄 입국 후 비를 피했던 주차장
몇십 분이 지났을까? 비도 살짝 그치고, 버스 탑승객 대부분이 국경 매점에 딸린 허접한 화장실도 갔다 왔을 무렵, 버스가 가까스로 국경을 넘었다. 다시 나는 내가 메고 끌고 온 거대한 짐을 버스에 실었다. 국경에 짐과 함께 내동댕이 쳐졌다가 버스에 타니 너무 아늑했다. 주원이와 엄마는 깊은 잠에 들었다. 버스는 어둑해지고, 노트북 배터리 방전을 우려해서 성제 오빠도 번역 작업을 더 이상 진행하지 않았다. 이미 밤이 깊었는데, 카자흐스탄의 식당들은 아직 성업 중이었다. 막 장사를 시작한 듯, 사람들로 붐볐다. 여기도 밤 문화가 있나. 아님 식사를 늦게 하는 건가.
카자흐스탄의 밤, 아직 많은 식당이 성업 중이었다.
어둑한 버스 안에서 성제 오빠는 자신 곁을 지나온 인연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나는 우즈베크에 사는 바허와 아이비에커와 있었던 서안 유학시절 얘기를 꺼냈다. 생각해 보면 나랑 우즈베크 친구들은 국적을 넘는 우정을 나누었다. 그런데, 막상 15년 만에 만나려니, 걔네는 남자고, 나는 여자여서, 각자 부양하는 가족이 있어서, 서로 15년간 연락도 거의 없어서... 이보다도 뻘쭘한 게 없었다. 그리고 잊히지 않는 과거가 있어서...
성제오빠는 "너는 아이비에커 만날 거냐?"라고 물었고, 나는 "글쎄요. 안 만나지 않을까요?"라고 했다.
잊고 살았다. 어쩌면 잊는 것은 불가능해서, 내 뇌 속에 작은 서랍을 만들고 서안 시절의 추억을 모두 낑낑 접어서 서랍에 밀어 넣은 다음에 자물쇠로 또 잠그고 거기에 종이로 붙여놨다.
[절대 열지 말 것]
그런데 성제오빠랑 얘기하고 보니 스멀스멀 그 서랍이 열리기 시작했다. 서랍이 열리니 슬슬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국경을 넘느라고 피곤하고, 추억을 얘기하자니 혼란스럽고, 우즈베크에 가면서 우즈베크 친구들과 만날 기약도 없고, 만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도 못 내려서 심란하고, 또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내가 너무 달라서 당황스러웠다. 성제오빠와 나는 새벽 1시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피곤해져 고개를 떨구고 잠을 청했다.
날이 밝자 버스가 속도를 슬슬 낮추었다. 자는 주원이와 엄마를 깨우고 또 온 짐을 모두 끌어내리고 메고 끌고 카자흐스탄 국경을 넘었다. 걸어서 국경을 통과하니 '이곳은 독재국가요!'티를 팍팍 내는 거대한 우즈베크 국경이 우리 앞에 떡하니 나타났다. 입국 사무소의 군인들도 코도 동글, 얼굴도 동글, 눈도 동글한 게 딱 아이비에커랑 바허 닮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냥 여행 온 것뿐인데 마음속에 '내가 이곳에 오다니, 미치지 않고서야...'라는 문장과 '도대체 어쩌려고 여기까지..'라는 문장이 반복해서 나타났다. 엄마와 주원이는 우즈베크 국경을 보고 사진 찍으며 좋아했다. 복잡한 나의 심정과는 다른 단순하고 명료한 감정이었다.
우즈베키스탄 국경
우리는 우즈베크 돈이 땡전 한 푼도 없었기 때문에, 버스가 다시 출발하기 전, 성제 오빠는 우즈베크 국경 한쪽 주차장 콘크리트 문턱에 걸터앉아 나에게 약간의 키르기스 돈을 받아 100을 곱해 환전을 해주었다. 우즈베크는 전체적으로 아주 깔끔했다. 길도 깨끗하고, 집도 깨끗하고, 길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타슈켄트는 고가도로부터 8차선 도로까지 대도시의 느낌을 팍팍 주었다. 성제오빠는 숙소가 우리랑 다른 지역에 있어 버스터미널에 가기 전 내렸다. 성제오빠는 그렇게 쿨하게 우리를 떠났다. 이제 성제 오빠랑 다른 숙소에 묵게 되면서,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어도 우즈베크어도 못하고 우즈베크 유심칩도 없는 우리 가족은 우리나라돈으로 약 5000원에 해당하는 우즈베크 현금만 들고, 완전히 성제오빠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