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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빵기는 요술상자인가? 애물단지인가?

갓 구운 빵이 그리워서 샀지만 결국 중고로 내놓아지는 제빵기의 운명

by 박수소리

나는 어떤 물건을 사는데 10년이나 망설인 적이 있다. 그 물건을 정말 잘 활용할지,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제빵기이다.

제빵기라는 물건이 있는지도 몰랐던 10년 전, 나의 회사 동기가 자신이 만든 식빵을 찍어서 카카오톡 자기 프로필 사진에 올렸다. 요리실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을 것 같은 그 동기오빠의 식빵은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누렇고 갈색빛이 감도는, 두 손으로 쫙 찢으면 글루텐 결이 제대로 형성된 군침 도는 네모난 식빵이었다. 이 정도 퀄리티라면 요즘 유행하는 베이커리카페에서 8000원에 팔아도 팔릴만한 비주얼이었다.

재료만 개량해서 한꺼번에 넣어주면 4시간 후 이런 찬란한 빵이 뿅 하고 기계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발효도, 반죽도, 굽는 것도 이 무뚝뚝한 비주얼의 제빵기가 해준다니, 제빵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나로서는 기적 같은 이야기였다.

'제빵기 식빵'으로 인터넷을 찾아보면 정말 많은 체험담이 나온다.

당장에라도 사고 싶어 쇼핑몰을 뒤적거렸는데, 막상 구입하는 걸 결심하기까지 무려 10년이 걸렸다. 나는 사지도 않을 거면서, 잊힐 때쯤 검색을 한 번씩 해보았기 때문에 브랜드별 제빵기의 가격과 그 변동추이까지 꾀게 되었다.


나를 망설이게 한 건 제빵기 크기였다. 식빵 한 덩어리 만들어내는 기계치고는 너무나도 거대했다. 부피로 따지면 정수기물통만 한 게, 무게도 그만큼이다. 빵을 얼마나 해 먹는다고, 이 좁은 집구석에 저 거대한 코끼리를 들이나.(당시 나의 신혼집은 13평이었다.) 시간이 흘러 13평이 17평이 되고, 다시 34평으로 커졌지만 여전히 나는 주저했다. 10년이나 쇼핑몰에서 제빵기를 검색했는데도, 나 자신이 제빵기를 잘 쓸 수 있는 인간인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움직인 것은 5살짜리 나의 아들이었다. 우리 집은 본래 빵을 잘 안 먹는데, 동네 놀이터에서 유치원 친구 엄마들에게 빵을 좀 얻어먹더니, 동네 프랜차이즈 베이커리를 한 번씩 쳐다보았다. 아무 빵이나 사 먹이면 되지 싶지만, 미국산 밀가루와 기름, 설탕이 투하된 빵의 세상에서, 우리 아이의 입맛만큼은 건강빵으로 붙들어 매고 싶었다.

GMO 수입기업은 뚜***를 경영하는 CJ가 일등...

드디어 나는 쇼핑몰에서 10년 동안이나 검색한 제빵기를 구입했다. 10년 간 고민했는데, 막상 결심하니 온라인결제에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틀 뒤, 거대한 제빵기를 감싸고 있는 더 거대한 제빵기 포장박스가 우리 집 앞에 당도했다. 크나큰 빵기계에 남편은 이 물건을 도대체 어디에 놓을 거냐고 난감해했고, 나는 또 한 번 사고 치는 마누라가 되어 머쓱해했다.

제빵기의 가격은 10만원 내외이다.

빵기계의 진가를 알아본 건, 친정엄마였다. 엄마는 제빵기라는 게 있는지 듣도 보도 못했다고 한다. 나와 신랑이 출근하고, 아이가 등원한 사이, 엄마는 소파에 앉아 돋보기를 끼고 제빵기회사에서 보내준 레시피책을 정독하기 시작하더니, 10분도 안 돼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마트에 가서 탈지분유, 이스트, 밀가루를 사 왔다. 제빵기 레시피가 거짓말을 할리는 없었지만,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엄마는 반신반의했는데, 정말 4시간 후 '삐삐삐'소리가 나더니, 뜨끈뜨끈한 빵이 요술상자에서 뿅 하고 나타났다. 맛도 정말 훌륭했다. 이제는 빵을 안 사 먹어도 되겠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좋고 간편한 게 어딨냐는 것이었다. 그 후로 엄마는 밀가루 20kg와 이스트 500g을 배달시켜 빵을 매일마다 만들었다. 옆집 할머니도 주고, 관리아저씨도 주고, 손자의 어린이집 선생님, 놀이터에서 만난 친구들까지, 매일 다른 사람들이 친정엄마에게 빵을 선물 받았다. 동네에 더 이상 줄 사람이 없을 때 엄마는 돋보기를 끼고 소파에 앉아 카카오톡 주소록을 한 번씩 흝어보고는, 몇 년 동안 얼굴도 한 번 안 본 동창까지 잘 지내냐고 연락하고는 갓 구운 빵을 들고나가, 식사도 대접받았다. 빵은 요술상자가 다 만들고 엄마는 꺼내서 포장만 했을 뿐인데, 빵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너무나도 고마워했다. 1500원어치 재료로 빵을 만들어서 주면, 빚지고 못 사는 사람들은, 도시에 살면서 정을 나누는 게 오랜만인 이 사람들은, 우리가 빵을 나눌 정도로 그렇게 친했나 겸연쩍은 사람들은 뜨끈한 빵 앞에서 가만히 못 있었다. 직접 텃밭 농사지은 무로 깍두기도 담가주고, 자기네 아이 어릴 때 입었던 옷도 빨고 정성스레 다려서 주고, 줄 것이 없는 사람들은 밥을 사주거나 커피를 사줬다. 친정엄마는 요술상자로 식빵외교를 하고 있었다.

제빵기가 제공하는 다양한 코스(출처 : 오성제빵기)

한 달 동안 열심히 빵을 굽던 엄마는 20kg 밀가루가 다 소진되었을 때 식빵 외교를 돌연 멈추었다. 엄마는 열정적인 사람이 분명했지만, 흥미가 떨어지면 그 열정도 모두 사그라든다. 제빵기를 샀을 때, 더 이상 빵을 베이커리에서 사 먹을 일이 없겠다는 엄마는, 그 후로 제빵기는 한 구석에 놓고, 바깥에서 친구와 약속이 있으면 빵을 다시 사 먹었다. 남한산성에 등산 갔다가 거기 유명한 베이커리가 있어서 맘모스빵을 사 먹고, 어디 단팥죽집이 유명해서 갔더니 마침 그집 단팥빵이 유명하대서 사 먹고, 커피가 맛있다고 가서는 제일 싼 아이스아메리카노 시켜놓고 커피값의 4배는 되는 빵들을 구입해서 먹었다. 또 어느 날은 누가 쿠폰을 줘서 프랜차이즈에서 식빵도 사 먹고, 초대형 슈퍼마켓 회원카드가 있는 친구 따라가서 한 봉지에 6개 들은 베이글도 구입했다. 제빵기가 아무리 잘했기로서니, 역시 베이커리 전문가들의 솜씨는 남달랐다. 전문가들의 빵은 언제나 부드럽고, 촉촉하고, 아름다웠다. 친정엄마는 제빵기를 투명물건 취급하기 시작했고, 나는 출퇴근으로 제빵기를 만질 기력이 없었고, 남편은 안 쓸 거면 어떻게 하라고 은근 한 두 마디씩 압박을 하기도 했다.


제빵기는 당근마켓의 단골손님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스스로 빵 만들어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 결국 빵 만들기를 포기하고 제빵기를 내놓는다. 밀가루값이 많이 올라 이제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에서는 식빵 좀 먹으려고 하면 4000원이 기본인 시대가 되었다. 시장빵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미국산 저렴한 밀가루를 쓴다고 해도, 우유값도 밀가루값도 오르는 이 세상에 천 원에 3개 공식은 깨진 지 오래다. 우리밀 빵은 더 비싸다. 우리밀 식빵은 6000원에서 7000원까지 생각해야 하고, 베이커리 카페에서는 빵 반절에 4000원(만약 빵 하나라면 8000원이라는 이야기)이 기본이다.


점점 빵에 돈이 축나는 세상에, 재료만 털털털 넣어놓으면 맛있는 빵을 만들어주는 착한 기계가 있다. 식빵뿐이랴? 딸기잼도, 케이크도, 수제비반죽도, 피자도우 반죽도... 주인이 레시피북대로 약속만 잘 지켜서 재료만 투입해 주면 못 만드는 게 없다. 이런 착한 제빵기를 사람들은 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빵이요? 사 먹고 말지요. 빵 얼마나 먹는다고 집도 좁은데 제빵기를 들입니까. 재료 개량하는 거 자체가 일이에요. 4시간이나 걸린다니요. 전기요금은 어떻게 합니까. 제빵기 제대로 쓸 수나 있을까요 저는 요리도 못하는데. 제빵기를 호기롭게 샀던 사람도 차츰 제빵기를 사지 않는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렇게 제빵기는 집의 천덕꾸러기가 되어 정가의 10%~40% 안 되는 가격에 당근마켓에 입성한다. 저 코끼리 같은 제빵기가 차지하는 공간이 견딜 수 없었던 사람들은 구매하겠다는 사람을 기다리다 못해, '나눔'딱지를 냉큼 붙여버린다.

물려받은 건데 저는 사용 못할 것 같아 나눕니다. 최대한 빨리 와주시는 분께 드려요..
아이들 어렸을 때 몇 번 해 먹었어요. 5번 사용했을까요? 성능 아주 좋고요 따끈한 빵이 나옵니다. 정가의 30%도 안 되는 가격에 드려요.
구매한 그대로예요. 박스, 레시피북도 그대로입니다. 안에 코팅이 살짝 벗겨졌는 데 사용하는 데는 문제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 제빵기는 어떻게 됐냐고? 한때 방치되었던 제빵기는 다시 나의 손을 만나, 주말마다 1번씩 빵 반죽을 열심히 수행 중이다. 제빵기는 예쁜 빵은 못 만들기 때문에, 반죽만 수행해 주면 나는 그 반죽을 꺼내 성형하고 굽는 작업을 진행한다. 유튜브 발효빵 굽는 과정을 지켜본 결과, 결국 빵에서 가장 힘든 건 반죽과 치대기 아닌가. 제빵기가 가장 힘든 과정을 거뜬히 해주면, 나는 날름 반죽을 거두어다가 성형해서 굽기만 하면 되니, 더 예쁜 모양이 나오고 있다. 물론 우리 집 사이즈에 비해 너무나도 큰 이 제빵기는 부엌에 두지 못하고, 안방 책상 서랍 옆에 놔두었다가 쓸 때만 꺼내고 있다.

제빵기가 다 해준 반죽으로 어느날 내가 구운 옥수수빵

제빵기가 요술상자가 될지, 아니면 천덕꾸러기가 될지는 사실 주인 마음에 달린 것 같다. 당근마켓에 아무도 입양해가지 않는 제빵기... 용기 내보세요. 당신도 요술상자를 가질 수 있습니다.


제빵기도 무료나눔딱지는 피해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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