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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소리 Jul 06. 2023

사마르칸트의 "한국사람이에요?"(4)

사마르칸트의 Tashkent street에서 곤란해하다-병아리사건

주원이는 거대한 핫도그를 절반이나 먹고는 배부르다고 했다.
 "슈흐랏, 정말 맛있었어요. 고마워요. 이제 배불러요. 갈게요."
 "이제 아가씨 어디가요?"
 나는 슈흐랏과 헤어지려고 슈흐랏이 절대 따라오지 않을 최대한 먼 곳을 말했다.
 "샤이진다 가요. 그럼 슈흐랏도 잘 가요."
 그러자 슈흐랏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알았어요."
 그러고는 우리와 또 다시 같이 걷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헤어지자는 뜻을 못 알아챈 듯했다. 걷다 걷다 보면 슈흐랏이 제 풀에 떨어져 나가겠지. 우리는 왔던 길을 다시 걸어 샤이진다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시압바자르 앞을 지나가고 있을 때, 리어카를 끄는 어느 수레장수가 지나갔다. 배도 부르겠다 낮잠시간이라 유아차에서 잠잠하던 주원이가 갑자기 말했다.
 "엄마, 병아리에요. 저거 봐봐요. 병아리 귀여워요."
 다시 보니 방금 지나갔던 수레장수의 리어카에는 무지개 색으로 염색한 병아리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슈흐랏은 주원이의 반응을 보더니, 수레장수를 불러 세웠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외쳤다.
 "사지마세요. 우리는 필요 없어요. 우리는 오늘 기차 탈 거예요. 병아리 필요 없어요."
 내가 했던 한국말이 너무 어려웠던 탓일까. 슈흐랏은 내가 싫다는 말을 모두 배제하고 기어코 빨간 병아리를 검은 봉지에 담아가지고 왔다. 이리 작은 생명에게 나는 어쩌다 이렇게 가혹한 운명을 주게 된 것일까. 내 앞에 놓인 병아리 앞에서 나는 순간 멍해졌다. 슈흐랏과 헤어지기도 실패하고, 배고프지 않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딱 봐도 불량식품인 핫도그도 애한테 먹이고, 이제는 병아리라니... 그나저나 이 가엾은 병아리는 어쩌지.


 병아리는 삐약삐약댔다. 손으로 감싸니 온기가 느껴졌다. 내가 따뜻하게 손으로 앉아주니 그제야 삐약삐약 소리를 멈추었다. 나는 병아리를 손에 감싼 채, 상상해 보았다. 병아리를 함맘에 데려가서 엄마의 잔소리를 듣는 모습, 병아리가 우즈베키스탄의 고속철도를 타며 삐약삐약대는 모습, 아이비에커나 바허한테 병아리를 인계하는 모습... 일단 그러기 전에 슈흐랏과 헤어져야 했다. 슈흐랏은 호의일지 모르지만, 내가 원하지 않는 호의는 강권에 불과하다.
 "슈흐랏, 우리는 이제 가야 해요."
 "샤이진다 안 가요?"
 "네, 안가요. 이제 엄마를 찾아서 함맘에 가야 해요."
 "알겠어요."
 슈흐랏은 이번에도 당연한듯 우리와 함께 함맘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병아리는 삐약삐약 대고, 돌길은 울퉁불통하고, 슈흐랏이라는 이 작자는 떨어질지 모른다. 나는 누구고, 여기는 어디고,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나.
 함맘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자, 슈흐랏이 말했다.
 "아가씨, 우리 집 바로 근처, 조금만 걸으면 돼요. 거기 우리 엄마 살아요. 가서 차 마셔요."
 "아니에요. 저는 슈흐랏의 집에 안 갈 거예요. 함맘에 갈 거예요. 이제 기차 타야 돼요."
 나는 더이상 웃을 수 없었다. 얼굴을 굳히고는 최대한 정중하면서도 슈흐랏이 알아들을 수 있게 천천히 말했다. 슈흐랏은 골목길에 들어서자 더 대담해졌다.
 "아가씨, 너무 아름다워요. 나 아이 좋아해요. 나 아직 결혼 안 했어요. 40살 넘었어요. 우리 친구 해요."

 슈흐랏이 순식간에 유아차를 잡고있는 내 왼쪽손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아....




 여자가 다니는 여행이 위협적이라고 느껴본 적은 인도에서였다. 대학생 시절, 유진언니랑 같이 휴학하고 인도에 갔을 때, 우리는 매일마다 생존을 위해 분투해야 했다. 캣콜링은 기본이고, 식당에서 밥을 먹어도, 해변에서 모래밭에서 티셔츠를 입고 쉬고있어도, 왠 남자들이 다가왔다. 하물며 가장 안전하게 느껴야할 호텔에 들어가도 싸구려 호텔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호텔주인이 찝쩍댔다. 견디다 못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동네 길거리에서 파랗고 큰 플라스틱 반지를 사다 네번째 손가락에 꼈다. 그 때부터 남자가 다가오면 말했다. 우리는 유부녀들이에요.



 그동안 말귀를 못 알아먹은 슈흐랏 앞에서 이번에는 내가 못 알아들을 차례였다.
 "슈흐랏, 이제 함맘에 다왔어요. 엄마가 아파요. 저 갈게요."

 슈흐랏이 내 등뒤에서 뭐라고 하며 자꾸 나를 간절히 불렀지만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함맘으로 들아갔다. 함맘으로 들어가자 슈흐랏은 더이상 쫓아올 수 없었다. 함맘 안쪽 불도 안켜진 어두컴컴한 휴식공간, TV보며 늘어져있는 함맘 할머니와 손녀, 그리고 아파서 누워있는 엄마를 보자, 가슴이 그때서야 뛰었다. 아니다. 계속 가슴이 뛰었는데, 이제서야 가슴이 뛰는 걸 인지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사실, 너무 무서웠다. 소파에 누워있는 엄마가 말했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말하자면 길어."

 내가 병아리를 쥐고 있는데도 엄마는 잔소리할 힘도 없는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나는 병아리를 함맘에 두고 가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료하게 하루종일 할머니 옆에서 티브이를 보던 손녀가 병아리를 보더니 손에 쥐고 아주 예뻐했다. 손녀는 병아리를 손으로 감싸고 친구들에게 자랑하려는지 밖으로 나갔다.
 엄마에게 목욕을 잘 했냐고 물으니, 옷을 다 벗고, 따뜻한 돌 위에 있으니, 세신사가 뜨거운 물을 뿌려주면서 등에 비누칠 해주고, 맛사지도 해주고, 때도 벗겨주었다고 한다. 단순히 그것만 했을 뿐인데, 그날 저녁 기침할 때마다 허리 아픈 증상이 조금 나아졌다고 했다. 아무래도 등에 세신을 하면서 전신순환하는 게 나아진 것 같다고...
 잠시 후 병아리를 안고 나갔던 손녀가 돌아왔다. 엄마의 번역기에 대고 소녀는 말했다.
 "옆집 친구네 병아리를 데리고 갔는데, 병아리가 없어졌어요."

하맘의 손녀와 주원이



 소녀 역시 병아리에 무책임했다. 오늘은 정말 통제가 안 되는 날이었다. 나의 불책으로 죄 없는 병아리가 보호를 받지 못하고 어디를 헤매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미안했다.
 기차시간이 가까워지자, 우리는 별일 다 있었던 사마르칸트의 타슈켄트거리에서 도망치듯이 택시를 타고 사마르칸트 기차역으로 떠났다.    



 에필로그 >

 전화번호를 교환한 페인트공에게 그 날 저녁 텔레그램 메시지가 왔다. 영어 번역기로 쓴 그의 말인 즉슨, 나에게 첫눈에 반했고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아마, 슈흐랏하고도 전화번호 교환했으면 분명 슈흐랏한테도 그런 메시지가 왔을 것이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유아차 끌고 다니는 아줌마한테까지 왜 그렇게 찝쩍댈까. 귀국해서 여러 정황 상 그들이 나에게 찝쩍댄 이유를 연구해보았다.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생산직으로 한국비자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한국에 가고 싶어 한국 여자랑 어떻게 해보려는 수작일 가능성이 크다. 아무리 한국여자여도 그렇지, 찝쩍될 대상이 없어서 남편도 있는 애 딸린 나에게 찝쩍대었을까.

 그건 그들이 나를 과부 혹은 이혼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슬림 문화권은 보수적이어서 여자가 혼자 여행다니는 경우는 없는데, 내가 유아차를 끌고 나다니고 있으니 분명 그들의 눈에는 과부 최소한 이혼녀로 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찝쩍대상에 속하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과부인들, 이혼녀인들 그들이 찝쩍대어도 되는것일까? 이슬람 문화권의 여성의 지위가 얼마나 낮으면 내가 이렇게 만만하게 느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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