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과 P슈퍼, 그리고 L슈퍼
무심코 지나치던 풍경의 일부분이 하루아침에 없어진다면
우리 집 근처에는 작은 동네 슈퍼가 하나 있다. 아니, 있었다. 편의상 이 슈퍼를 P슈퍼라고 하겠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으로 이사 온 지 5년 차에 접어드는데도 나는 한 번도 이 P슈퍼의 주인을 본 적이 없다. 슈퍼가 언제 열고 닫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 P슈퍼에서 10m 남짓 떨어진 곳에는 현대 문명의 집합소, 편의점이 있다. 나도 간혹 간식거리나 간단한 식사류, 맥주 한 캔 따위를 사기 위해 들리는 곳이다. 사실 최근 들어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식비에 조금 여유가 생겨 편의점 지출이 는 참이다.
아무튼 이 P슈퍼는 여느 동네에 있을법한 그런 작은 슈퍼였는데, 지나치면서 곁눈질로 관찰한 바로는 있을 건 다 있는, 나름 알찬 구성을 자랑하는 슈퍼였다. 짐작컨대 주 고객층은 주변 아파트에 사시는 어르신들인 듯했다. 나는 항상 바로 옆에 편의점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장사가 되기는 하는 걸까, 속으로 내심 염려하며 그 옆을 지나치곤 했다. 주인은 모르지만 집을 나설 때면 여지없이 마주치기 때문에 모종의 내적 친밀감이 형성된 듯하다.
그런데 이 P슈퍼가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헐리고 있는 것을 봤다.
"지금까지 P슈퍼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든가 "모월 모일까지 영업합니다"라든가 하는 문구가 쓰인 종이 한 장 붙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없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그 감정은 곧 알 수 없는 씁쓸함으로 바뀌었다. 왜였을까? P슈퍼에서 라면 한 봉지도 산 적 없는 내가 왜 그 부재를 씁쓸해하는가.
며칠 전에서야 해답을 찾았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근처에는 딱 이 P슈퍼 같은 동네 슈퍼가 하나 있었다. 이 슈퍼는 L슈퍼라고 지칭하겠다. L슈퍼는 어린 학생들이 주 고객층이었던 만큼 각종 아이스크림과 과자, 그리고 불량식품이 넘치던 곳이었다. 아직도 더운 여름날이면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던 학교 친구와 500원을 모아 콜라 슬러쉬 큰 컵을 하나 사서 둘이 한 입씩 나눠 먹으며 집으로 향했던 기억이 선하다.
성인이 되고 예전에 살던 동네에 다시 가게 될 일이 있었다. L슈퍼가 아직도 있을까 기대 반, 설렘 반으로 갔는데 그곳에는 웬걸, 편의점이 떡하니 들어서 있었다.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경제의 큰 흐름 같은 것은 읽을 줄 모른다. 다만 대형 프랜차이즈 마트의 시장 점유율이 높아진다는 건 자본력이나 브랜딩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작은 슈퍼들이 경쟁에서 도태되기 쉬워진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옛날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건 어른들이나 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내가 그 어른의 시선으로 예전에 살던 동네를 바라보고 있다. 시대의 변화는 자연스럽고 타당해 보이지만, 그로 인해 나의 추억이 묻어있는 장소들이 사라지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부당하게 느껴진다. 나는 그저 동네 슈퍼의 손님 중 한 명이었을 뿐이지만, 동네 슈퍼 주인 분들은 단순한 안타까움이나 부당함을 넘어 생계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 처하실 수도 있는데, 내가 뭐라고 이런 감정을 느끼나 싶기도 하다.
다시 P슈퍼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나는 L슈퍼, 엄밀히 말하면 사라진 L슈퍼를 생각하던 그 마음으로 P슈퍼를 바라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용하지 않았지만 (사실 대체 왜 이용해볼 생각을 한 번도 못했는지 그것도 의문이다) 언제까지고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켜주었으면, 하는 조그마한 응원이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내 마음 한 구석에서 솟았달까.
매일 무심코 지나치던 동네의 풍경 중 아주 작은 일부분인데도, 역시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것인가,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든다. 그렇지만 P슈퍼가 없는 우리 집 앞 삼거리에도 나는 곧 익숙해질 것이다. 또 다른 변화도 생기리라. 오늘도 전국 수많은 동네에서 저마다의 작은 변화들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서도 뭔가 마음 한 구석이 아릿한 것이 참 이상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