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것일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고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없는 사람'이다. 마음을 터놓을 친구도, 이해해 줄 사람도 없다. 가족들 역시 내 편이 아니다. 모든 것이 족쇄처럼 느껴지고 숨쉬기가 어렵다. 무거운 짐을 그만 내려놓고, 쉬고 싶다. 유일한 방법은 모든 것을 끝내고 다시 시작하는 것뿐이지 않을까.'
과거 일기장의 한 장면이다. 왜 이런 글이 일기장에 쓰여있었을까에 대해 생각해본다. 당시의 사고방식은 현재로써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관적이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며 삶을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희망은 모두 죽었다. '생각, 행동, 감정'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부정적인 방향으로 치우쳐 있었고 합리적인 의사 판단과 균형된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모든 것이 현실로 반영되며,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존중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키도 작고 별 볼일 없었던 나는 누군가로부터 무시당하는 것이 싫었다. 학업 또는 업무에서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의지가 되고 싶었고, 자신의 몫은 충분히 하는 신뢰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맡은 일을 빈틈없이 처리하고자 노력했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 나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는 모습에서 보람을 느꼈고, 선생님을 꿈꾸기도 했다. 주위에서 나에게 거는 기대가 커지길 바랐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랐다. 사관학교를 선택하면서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꿈은 포기해야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직업군인으로서 나는 무던한 성격으로 집단생활에 녹아들어 갔고, 성실하고 모나지 않은 성격 탓에 적을 만들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나의 속내는 언제나 불안했다. 현재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했으며, 누군가로부터의 인정과 관심에 의존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 확신이 침몰되고 불안이 더해지는 것이 심해졌다. 계급과 경력은 쌓여갔지만, 정작 무엇을 이루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앞섰다. 정처 없이, 무의미하게 나이만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진급에만 사활을 건 전투복 입은 정치 직장인들을 보며 느끼게 되는 직업군인으로서의 윤리적 회의는 점점 현재의 직장을 유지할 동력을 마비시켰고, 그런 그들에게 고개 숙여야만 하는 내 처지를 비관하게 했으며, 나약하고 정의롭지 못한 존재로 자책하게 했다. 이 일을 '왜' 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강해지고, 답을 찾을 수 없는 날들이 쌓여갔다.
한편으로는 끊임없는 예기불안에 시달렸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는 일이 잦아졌고, 이러다 언젠가는 큰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았다. 물론,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내가 그 대상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실수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다. 그 안에서 계속해서 과거의 실수들이 떠올랐다. 운이 없었던 경우도 있었고, 예상하지 못한 변수도 있었지만, 문제의 원인을 강박적으로 나에게 돌리고, 무자비한 죄의식에 시달렸다. ‘조금 더 신경 썼으면 되었을 텐데. 괜한 말을 꺼내는 바람에 일이 틀어졌어. 한 번 더 연락을 해볼걸.’ 모든 게 내 탓처럼 여겨졌고 스스로 고소인과 판사 역할을 자처하며 자신을 '피고인'으로 만들어 심판하고 있었다. 자책감과 죄의식, 강박과 불안 등에 시달렸지만 그런 감정을 맞장구칠 수도, 부인할 수도 없었다.
우울감에 시달리는 때가 많아졌고, 한숨이 늘어났다. 주위 사람들은 걱정 어린 시선으로 나를 봤다. 나는 특별한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많이 피곤하다고 느꼈다. 아무것도 재미가 없었지만 하기 싫은 일을 버텨야 하니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가족들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감각한 하루가 계속 이어졌다. 이때쯤 게임에 중독적으로 빠지기도 했다. 잠이 잘 오지 않았고, 폭식이나 음주가 많아졌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더 힘들어졌고 몸에는 한 줌 기력이 없었다. 기계적으로 출근했지만 껍데기뿐이었다. 이런 악순환이 길어지면서 나는 이미 우울증에 도달해 있었다. 그때 즈음 지독한 사람을 만났다. 여러 가지 신체증상까지 나타나며, 오랜 시간 눌러두었던 우울증은 결국 커밍아웃되었다.
자존감이 저하되면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지나치게 낮추어 바라본다. 무너져 내린 자기 확신으로 인해 자기 평가가 하향 일로로 이어지고, 겸손을 가장한 자기 비하로 인해 다른 사람들 또한 불편함을 느낀다. 타인의 부정적 피드백을 양산하고, 이것이 하향된 자기 평가를 증명하는 현실적 근거로 재입력되어 부정적 자기 평가를 강화한다. 부정적 자기 평가는 자존감을 더욱 저하시킬 뿐 아니라, 타인들의 평범한 시선마저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별 뜻 없는 말도 상처가 되고 의미 없는 시선도 공격적으로 느낀다. 망상적 불안은 표정, 눈빛, 행동, 분위기 등의 비언어적 신호를 통해 주위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고, 타인과 연결되는 다리를 끊어버린다. 오해로 불편해진 관계는 심리적 거리감을 만들고, 많은 사람들 속에 존재하더라도 외로움을 느낀다. 내편이 없다고 느끼며, 고립무원의 감정 속에 삶을 비관하며 하루를 보낸다.
인간은 장점과 단점을 고루 갖춘 불완전한 존재다. 단점을 가리고 완벽함을 연기하는 것은 훌륭한 사회적 전략이지만, 여기에는 기회비용이 있다. 일부를 전체로 치환하려 하는 과정에서 솔직함을 잃어버린다. 감추려는 노력은 자아를 비틀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게 한다. 완벽한 연기는 연기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몰입을 필요로 한다. 그 몰입이 원래 자신의 모습과 자신이 연기하려고 하는 모습 사이의 괴리감을 증가시킨다. 점점 더 원래의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되고, 언젠가는 다른 사람을 연기하는 것에 염증을 느끼지만 너무 멀리 와버린 탓에 출발점이 어디였는지 찾을 수 없게 된다. 결국 우리는 완벽함을 연기하려 할수록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게 된다. 이것은 또 다른 좌절을 부른다.
존중은 완벽한 존재에 대한 표창장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은 완벽함, 능력, 지위, 직업 등과 관계없이 누구나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스스로의 현실적 처지를 비교하고 평가하여, 자신을 존중받지 못할 존재로 격하시킨다. 비교는 인간의 뿌리 깊은 본능이다. 비교의 올바른 기능은 내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판단하는 데 있다. 하지만 사회적 지표에 익숙해진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와 비교하며, 자신의 현재 위치를 평가하고, 상대와의 우열을 가르려 한다. 이것은 우리를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게 한다. 과도하게 높은 잣대를 내면화하는 것은 죄의식, 자책, 피해의식을 강화시킨다. 자신을 부족하게 여김으로써 무시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낀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는 '인정 욕구'가 있다.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욕망이다. 스스로를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의 인정과 관심에 지나치게 의존한다.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할수록 기준을 자신에게서 타인에게로 이전시키게 된다.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게 되고, 타인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자신을 비난한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의 인정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이전에 우리는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 현재의 상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만으로 충분히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중받을 수 있는 존재다. 이 권리를 잊어버리거나 스스로 포기해서는 안된다.
자신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자기 스스로다. 타인이 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대단히 제한적이다. 심지어 부모도 제 아이를 모른다. 자신을 온전히 판단하기 위해 타인으로부터 피드백을 받을 수는 있다. 타인의 의견을 '참고'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하고, 그들로부터 존중받아야만 인격체로써의 한 사람이 형성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자신에 대한 존중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대한 인정과 수용을 기반으로 한다. 내가 나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 부족한 나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기에 구태여 숨길 필요가 없다. 숨길 것이 없으니 당당해지고 솔직함에서 발산되는 매력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준다. 완벽함에 대한 연기로부터 벗어나 자기표현의 자유를 얻는다. 관계에 대한 좋은 경험이 긍정적인 자기 평가를 지지해주고 이런 선순환은 자신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해 준다.
감정은 '에너지'다. 선택과 결정의 순간에 감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선택을 하지 못하거나 시기를 놓친다. 내가 가진 감정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은 이제까지 분리되어 있었던 자신의 조각들을 하나의 그림으로 맞추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자신에 대해 안다는 느낌은 굉장한 용기를 준다. 용기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 계속 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계속하는 것이다. 감정을 대하는 태도도 그렇다. 감정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아무리 감정에 대해 알고,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더라도 때때로 분명 감정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뇌가 발달되는 과정에서 파충류의 뇌가 가장 먼저, 깊숙한 곳에 만들어지듯이, 본래 인간이 감정적 동물이었던 오래된 뿌리에서 기인한다. 중요한 것은 뿌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많은 문제들은 자신에게 그런 문제가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해결된다. 가장 위험한 상태는 문제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이른바 '문제의식'이 마비된 상태다.
감정을 다스리고 관리하여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더 빠르게 달릴 수 있게 해주는 '명마'로 만들어야 한다. 감정을 이해하면 나를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나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려놓으면 자신을 수용할 수 있다. 감정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모든 감정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감정과 함께 살아간다. 모든 순간에 감정이 작용하고, 그 감정을 해석하는 주체는 자신이다. 취약한 감정을 이해하면서 자신의 취약점과 상처를 확인할 수 있다. 흥분하고 분노하고, 불안해하는 나를 이해하고 변호할 수 있다. 무조건적인 자기 합리화에 빠지지 않고 내가 왜 그랬는지에 대해 차분히 분석해볼 수 있다. 이런 시간들이 나를 이해하고 수용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을 이해해야만 한다. 조금 더 자신을 사랑할 수 있으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