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이 만들어내는 비틀림과 편견 속의 나
스포츠 경기는 결과가 모든 것을 덮어버리기 쉽다. 월드컵 경기에서 후반전 40분까지 우리나라는 1:0으로 리드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불과 마지막 5분 사이에 2골을 내리 내어주며 역전당했고 결국 2:1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고대했던 원정 16강 진출은 그렇게 무산되고 말았다.
대중과 언론은 마지막 5분 사이에 2골을 내주면서 패배했다는 사실만을 기억하며 국가대표 선수들과 감독을 질타하기에 바쁘다. 어느새 90분 중 85분을 1:0으로 리드를 지키며 안정적으로 경기해왔다는 사실은 원래 없었던 일처럼 사라져 버린다.
이것이 기억의 실체다. 기억은 인간에게 내재된 여러 가지 결함을 반영하며, 모순덩어리인 인간의 속성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결과와 같은 여타의 요소들로 인해 왜곡되고 변질되기도 하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은폐되기도 한다. 현재의 상황, 감정 등에 휘둘리는 일도 흔하다. 자신의 기억이 반드시 '진실'이라고 맹신해서는 안 된다. 마치 이혼상담을 하러 온 부부처럼, 그들의 말은 완전히 상반되지만, 그중에는 완벽한 거짓도 진실도 없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가진 기억도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음을 고려사항에 반영해두어야 한다.
감정을 현명하게 다스리려면 '기억의 여과 장치'를 의식 회로에 장착해두어야 한다. 인간이 늘 그렇듯 기억 역시 함부로 믿을 것이 못된다. 당연하게도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일들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어떤 식으로든 의식적으로 기억에 남기려 애쓰는 매우 특정적인 정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것들은 사라지고, 뇌가 반드시 기억에 남겨두어야 한다고 판단한 일들만 무의식적으로 기억에 남는다. 어떤 일들은 내가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너무나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우리를 괴롭히기도 한다.
뇌가 기억에 남겨두어야 할 내용이라고 판단하는 근거 중 하나는 생존을 위해 '중요한' 정보일 때다. 이런 사건들은 대부분 급격한 감정의 변화를 수반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 극도의 불안 같은 것들이다.
"잔인한 장면을 목격했을 때, 고통스러운 사건에 직면했을 때, 가까운 사람의 비극적 사건을 경험했을 때, 죽음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왔을 때." 이러한 무수한 유형의 경험과 기억들이 각자의 '트라우마'로 자리 잡는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트라우마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무의식의 영역에서 판단과 결정을 휘저어놓는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되는 것은 재발방지 차원에서 뇌가 반드시 필요한 정보라 판단한 결과다. 당시의 상황과 충격이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했기에, 그와 같은 경험을 다시금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작용인 것이다. 이것은 프로 바둑기사가 대국을 복기하며 패인을 분석하듯이, 당시의 상황을 되돌아보는 것과 같다.
문제는 이런 기억들이 결코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괴로운 기억들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심장을 멈추고 싶다 하여 임의로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병균이 침투했을 때 면역체계가 기능하는 것처럼, 자율신경계의 작용은 이미 우리 손을 떠나 있다. 이처럼 강력한 무의식이 강제 주입해둔 정보는 임의로 삭제할 수 없다. 의지와는 달리 기억에서 지우고 싶지만, 지워지지 않는다.
안타까운 점은 지키기 위한 작용이 되려 우리를 죽이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이종 단백질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으로 죽을 수도 있는 것처럼 우리는 내 안의 내가 아닌 존재들에게 극히 취약한 존재다. 전신에 2도 화상을 입은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매일을 지옥 같은 고통을 견뎌야만 한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자신을 지킬 수 없지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고통은 자신을 미치게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은 부정적 감정의 홍수 속에 자신을 잃어가는 모습과 꼭 닮아있다.
기억은 부정적인 사건에 유난히 민감하다. 생존 기계로써 본래의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인간은 그렇게 설계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개체가 살아남아야 종족이 되고, 종족이 번성해야만 파충류와 포유류가 지배하던 세상에서 결국 '인류'라는 종족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 테니까. 신체적 능력이 빈약한 인간은, 뇌가 가진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기능을 극한으로 사용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확인하고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확인하고 경계해야만 종족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 잔재가 지금까지 남아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일지도...
으르렁거리는 늑대가 나를 쫓아오는 실질적인 위험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위험이라고 ‘인식’할 상황은 도처에 산재해있다. 사회적 동물로써 공감능력과 감수성이 뛰어난 인간은 상대방이 가진 공격적 성향을 기가 막히게 잡아내는 본능이 있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직감'과도 부합하는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위기와 위험을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능력.' 이것은 어쩌면 언어나 문자가 발달되고 사회나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에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뭉쳐야만 했던 인간의 근원적 기질일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사람은 위기에 민감하고 불안에 떨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것은 대를 이어 현재까지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상대방의 눈초리나 표정, 입꼬리, 걸음걸이, 숨소리. 이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는 상대방이 나를 적대하는가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그가 지금 내 말에 지루함을 느끼는지, 귀 기울여 듣고 있는지, 내 말에 동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나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다가 갑작스럽게 자리를 피하는지.' 이런 것들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부단히 레이더를 돌리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위기 감지 능력의 정확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에 있다. 상대방은 생각에 잠겼을 뿐인데 내가 상대방에게 말을 잘못한 것인가 노심초사하기도 한다. 상대방은 그저 다른 일들로 신경 쓰이고 피곤할 뿐인데, 정작 나는 나와의 만남을 지루해하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상대방의 사소한 변화에도 권태기가 온 건지 전전긍긍하게 되고,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 받고 싶어 진다.
궁금하고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다면 터놓고 물어보면 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잔인한 현실을 직면하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진짜 마음을 알면 관계가 끝날까 두렵고, 그런 상대방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다. 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면서도, 상대는 내 마음을 헤아려주기를 바라는 이중적인 나를 발견한다. 두려움은 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문을 두드리지 못한다. 문 앞에서 돌아서는 일이 반복되며 만들어진 회피하는 습관은 자신만의 논리를 만들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바쁘다.
인간관계가 힘들어지는 원인은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라는 '욕심'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나에게 관심조차 없고, 몇몇 사람은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에게 관심도 없는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사람들의 미움, 분노와 질투 때문에 힘들어한다.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런 일들은 기억에도 더 자주, 더욱 생생하게 남는다. 힘든 일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함이라는 선한 목적의 작용들이지만, 정작 그 기억의 무게에 짓눌려 삶은 힘들어지고 기억 속에는 관계로부터 상처 받은 일들만 아우성을 친다.
‘관계=상처, 타인=적’
이런 공식이 완성되면 사람들을 믿을 수 없게 되고,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피하게 된다. 함께 있지 않으면 상처도 받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 단정 짓는다. 방어적인 눈빛은 상대방을 움츠러들게 하고 묘한 기분마저 느끼게 한다.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의심은 상대방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고, 나의 불안을 현실로 소환해낸다. 적절한 근거를 찾아낸 불안은 더욱 강화되고 세상은 더욱 적대감으로 가득 찬다.
기억의 비틀림과 인간이 가진 근원적 불안들로 인해 우리의 삶은 무의식적으로 나쁜 일들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 90%의 좋은 일들이 10%의 나쁜 일들에게 묻힌다. 악역들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진다. 총소리가 난무하고 두려움으로 벌벌 떠는 소시민들은 집 밖으로 나올 엄두를 내지 못한다.
생각이 부정적으로 흐른다고 해서 자책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개인의 탓이 아니다. 만약 이것이 누군가의 탓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존재 자체를 부정해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내가 이토록 나쁜 일들만 ‘자동’적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아차리면 된다. 내가 가진 그동안의 기억들이 지극히 부정적인 방향으로 편향되어 있었다는 사실만 ‘인지’하면 된다. 모르는 것에는 대항할 수 없지만 일단 알아차리는 순간 의외로 쉽게 해결되기도 한다.
‘정반합’의 원리를 떠올리면 된다. 무의식적으로 나쁜 일들을 기억 저장고에 밀어 넣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면, 나쁜 기억들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을 시작해보면 된다.
'내가 기분 나쁘게 생각했던 일이 정말로 그렇게 기분 나빠야만 했을 일이었을까? 내가 오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상대방은 아무런 악의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더불어 나쁜 기억들에 대항할 만큼 좋은 기억들을 ‘의식’적으로 남기는 노력을 하면 된다. 하루 중 나에게 있었던 좋은 일들을 기록하고 떠올려보자. 이러한 작업이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필요성'만 체감할 수 있으면, 일상 속에 감사하고 좋은 일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좋은 일도 많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당연’ 한 것이 아니었구나.'
이런 것들을 느끼면 평범하고 흔하다고 여겼던 일들에 ‘감사’를 느낄 수 있게 되고 감사하는 마음이 누적되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주위 사람들 역시 다르게 보인다.
자신을 이해하면, 세상을 보는 렌즈가 바뀐다. 내게 씌워져 있던 프레임에 변화가 일어난다. 자신에 대해 알아갈수록 비틀림을 바로잡는 ‘교정’ 능력이 생긴다. 균형 잡힌 시선으로 나에게 ‘매몰’되지 않고 세상과 타인과 나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상대방에 대한 이상화된 이미지가 '콩깍지'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른 것을 틀리다 여기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상대방과의 적절한 거리를 찾을 수 있게 된다. ‘간섭’ 하지 않고 스스로 ‘변화’할 수 있도록 ‘지원’ 해 줄 수 있게 된다. 상대가 ‘변한’ 것이 아니라 ‘편안해진’ 것이라고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사람과 인간에 대한 이해는 이와 같은 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 상대가 사회적 ‘가면’을 벗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안전한’ 사람이 될 수 있게 해 준다. 사람 사이의 틈(人間)에 존재하는 수많은 관계들에 대한 ‘통찰’이 생긴다.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이 자신‘만’을 사랑하라는 것인 줄 알고 걱정스러워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수용하라는 말과 같다. 자신 안에 매몰되고 자신만 바라보는 것밖에 모르는 편협한 세상 속을 사는 것과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은 전혀 다른 것이다.
자신의 '날 것' 그대로를 바라본 적이 없는 사람은 쉽게 타인을 무시하고 비판한다.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남의 상처를 우습게 본다. 내가 아는 것, 내가 경험한 것, 내 생각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 나름대로의 정의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자신의 정의만을 강요한다.
자신의 상처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상대방의 상처도 보듬을 수 있다. 이것은 보는 ‘눈’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하루 중 거울 속의 나를 가장 오래 보는 사람은 부모도, 가족도, 친구도 아닌 바로 ‘나’다. 나에게 그만큼의 오랜 관심을 가져줄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자신밖에 없다. 그런 자신의 모습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타인을 ‘이해’할 수 있을까.
타인에 대한 이해는 철저히 ‘자신’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감정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자신의 생각이 어떤 회로를 이루어가는지, 자신의 습관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민감한 것, 오래된 상처와 기억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자신만의 이해와 해석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 자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져 갈 때, 무성의한 비판과 일방적인 판단이 아닌, 진정성 있는 이해와 수용의 범위가 '나'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타인에게까지 서서히 확장되어갈 수 있다.
인간의 뿌리는 어디까지일까? 하나의 껍질을 까면 또다시 새로운 껍질이 나오는 양파처럼, 인간이라는 존재 역시 파면 팔수록 계속해서 더 깊은 뿌리가 드러나는 것을 느낀다. 인간에 대해 알면 알수록 참으로 부족하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내가 큰 인생의 실패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불완전한 '나'에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희망적인 점은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고 받아들일 때 한계를 넘어 발전할 ‘가능성’도 열린다는 점이다.
노력하지 않기에 정체되며, 자신만의 세상 속에 갇혀 좁은 구멍 위로 보이는 하늘이 전부일 거라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필연적인 흐름이다. '데미안'으로부터 날아든 편지에서처럼 새가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알’이라는 좁은 세상을 깨트려야 하듯이, 내가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수많은 편견, 고정된 생각, 편향, 부조리, 이중성 등을 깨트려야 한다.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이토록 중요하다. 선글라스 밖의 세상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우리는 다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자신이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