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소식

저는 여전히 쓰고 있습니다, 우산을.

by 작가 전우형

요즘 통 소식을 전하지 못한 것 같아,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의 부분 부분을 올려드립니다. 마침 어제오늘 전국에 비 소식이네요. 조금은 속이 시원해진 것 같습니다. 갈증은 어쩌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우린 늘 누군가를, 무언가를 기다리고 또 원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깨끗하게 정리하고 나면 곧 그곳을 떠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마치 이제는 내가 여기 더 앉아있으면 안 될 것 같달까. 내가 있을 자리까지 모두 치워버린 느낌이랄까. 그런데 그게 꼭 지금 같아요. 제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여전히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어요.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먼지 자국이 생길 정도로요. 거기서 떨어진 먼지가 깨끗함을 망쳐버릴까 두려워요. 그럼 넌 이곳에 어울리지 않아, 하고 목소리가 말할 것 같아요. 그래서 그냥 지저분했으면 할 때가 있어요. 발자국이 보이지 않게.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제 기억에는 꼭 없는 부분이 있어요. 예를 들면 아파트 단지에서 제초작업을 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게 언제였는지 기억하지 못하거나, 감명 깊게 들은 노래가 있었는데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거나 하는 식이죠. 수염을 깎다 보면 그럴 때가 있어요. 턱 아래쪽을 너무 신경 쓰다가 콧수염을 아예 밀지 않는 거죠. 그때 로봇 청소기가 옆을 지나가요. 들이받고 들이받고 또 들이받으면서 끝끝내 길을 찾아가는 모습이 미련하고 답답한 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에는 그런 제가 좋았어요. 멋지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죠. 하지만 요즘은 조금 힘드네요. 어딘가 고장 난 것 같아요. 이제는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유유히, 고상하게 살고 싶어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하도 들이받아서 이제는 이상한 소리가 나는 저 로봇청소기 같아요. 한 때는 신제품이라며 비싼 돈을 주고 샀지만 이제는 공짜로도 어디 줄 곳 없는, 버리는데도 돈을 내야 하는 퇴물. 오갈 곳 없는 신세.


바람이 몰아치는 여름밤이었어요. 우리 집은 20층이었는데 옥상에 설치된 환풍 팬 돌아가는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죠. 비가 올 거라고 했었거든요? 분명히, 저녁 일곱 시 뉴스 기상 캐스터가 오늘 밤 중부 내륙지방을 중심으로 300밀리 이상의 폭우가 쏟아질 거라고 단언했죠. 하지만 단언컨대, 자정이 지날 때까지 비는 내리지 않았어요. 한 방울도. 아스팔트는 여전히 메말라 있었고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만 시끄럽게 창문을 흔들 뿐이었죠. 저는 비를 기다렸어요. 빗소리가 듣고 싶었거든요.

어릴 때는 비 오는 게 싫었어요. 특히 신발과 양말이 젖는 건 질색이었죠. 아침 비를 맞으며 등교하는 날은 온통 축축한 양말 냄새가 교실에 가득했어요. 그건 발 냄새와는 또 다른 종류였죠. 코를 막아도 쿰쿰함이 느껴지는 냄새랄까. 우산을 앞으로 밀면 가방이 젖고 뒤로 눕히면 허리까지 옷이 다 젖었죠. 비를 피할 방법은 없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우산을 챙겨가는 걸 깜빡했지 뭐예요. 하늘은 거무죽죽하고 곧 비는 쏟아질 것 같은데 겁도 나고 막막했지만 뭐 어쩌겠어요. 비야, 올 테면 와 봐라. 오늘은 미련 없이 맞아주마. 하고 학교를 나섰죠. 그런데 정말로 폭우가 쏟아지는 게 아니겠어요? 순식간에 온 몸이 축축하게 젖었어요. 여름이라 정말 무더웠는데 비를 맞는 순간 갑작스럽게 한기가 느껴졌어요. 그러다 신발이 찰박찰박할 정도로 속옷 안쪽까지 완전히 젖고 나니까 그만 웃음이 나지 뭐예요. 빨리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그때부터는 비를 맞는 게 아무렇지 않았어요. 저는 팔을 최대한 펼치고 위를 올려다봤어요. 굵은 빗줄기가 얼굴을 두드렸죠. 저는 입을 쩍 벌렸어요. 그러자 입 안에 물이 금세 차올랐고, 삼키지 않으려 애썼지만 결국 조금은 삼키고 말았어요. 그때까지 마셔 본 어떤 물보다 맛이 좋았어요. 그 후로 비가 좋아졌죠.

바람소리가 조금 바뀐 것이 느껴졌어요. 쏴아 하는 소리가 커졌죠. 후덥지근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서늘해졌어요. 처음 우산 없이 비를 맞던 그날처럼, 저는 창문을 열고 양손을 쭈욱 뻗었어요. 하지만 손에 닿는 느낌이 별로 무겁지 않았어요. 윗집 베란다가 툭 튀어나온 부분이 처마지붕 같은 역할을 했나 봐요. 저는 창틀을 밟고 올라가 어깨까지 팔을 최대한 내밀었죠. 그제야 빗방울이 제대로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사납고 묵직한 촉감이 손바닥을 두드리는 느낌이 좋았어요. 바람을 따라 비가 춤을 추었죠. 한 번씩 샤워기를 튼 것처럼 집 안까지 물이 들이치기도 했고 어느새 창틀에는 찰랑찰랑할 만큼 물이 차 있었죠. 어쩔 수 없이 창문을 닫았어요. 폭우 소리가 순식간에 잔잔해졌죠. 갑자기 세상이 확 멀어진 느낌이랄까.


당신은 그저 잃어버리는 게 싫었을 뿐이에요.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해 본 적 있나요? 사랑은 지키는 게 아니에요. 함께하는 거지. 당신에게서 느껴지는 건 분노, 그래 분노뿐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그 분노마저도 아껴두고 있군요. 뭘 그렇게 지키려고 애쓰는 건가요? 저는 당신이 솔직해지길 바라요. 남의 말보다 마음속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믿으세요. 그 목소리가 당신의 진심이니까. 과거를 해부하려 하지 마세요. 지금 제 앞에 있는 사람은 과거의 당신이 아니에요. 저는 지금이 좋아요. 이제 그만 상처 입혀도 되잖아요? 무덤을 파헤쳐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요. 다시 들쳐볼 수 없도록 기억 가장 깊숙한 곳에 묻어 두세요. 수술한 부위가 아물 때까지 실밥을 뜯어내지 마세요. 아프려고 그만 노력해도 돼요. 제가 알아요. 그럼 충분하지 않나요? 쉬어도, 즐거워도, 행복해도 돼요. 정말로, 그래도 돼요.


텅 빈 주차장에 혼자 앉아있는 여자를 봤어요. 문득 궁금해지지 뭐예요? 저 여자는 구름 낀 여름 아침에 아무도 없는 식당 주차장에 무슨 일로 주저앉아 있는 걸까? 핸드폰으로 뭘 보고 있는 걸까?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데. 밤새 내린 비에 웅덩이진 물들이 자동차라도 한 대 지나가면 그녀에게로 쏟아질 것 같은데. 이제 대답해 보세요. 저는 왜 그 여자가 보였을까요? 어째서 지금까지도 아른거리는 걸까요? 멀어서 그 여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왜 그 여자가 울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질까요?

쭈그려 앉은 모양새가 너무 작아 보였어요. 너무 작아서 어른인데도 아이처럼 보였어요. 작아지는 데는 이유가 있어요. 이유를 생각하다 보면 어딘지 짓눌리는 것 같아요. 커다란 손 하나가 저를 누르는 것처럼 가슴이 조여 와요. 가서 말을 걸어보고 싶었나 봐요. 무슨 일인지 묻고 일으켜 세워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그냥 지나쳤어요. 잠깐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렇게. 어쩌면 그게 문제였나 봐요. 가서 물어봤으면 아무 일도 아닌 걸 알았을 텐데. 어쩌면 그 여자는 그냥 아침에 심심해서 마당 같은 주차장으로 나와 지나가는 차들을 보고 있었을 뿐일 수도 있는데. 그러다 다리가 아파서 쪼그려 앉아 핸드폰에 온 문자를 확인하고 있었을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