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막-8
<4막-8>
이 말을 끝으로 오수는 입을 다물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우진의 눈은 또렷해 보였다. 마치 그렇게 쳐다보고 있으면 상대방의 진실과 거짓을 꿰뚫을 수 있다는 듯이. 하지만 정작 우진은 자신이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우진은 다만 어떤 의무감 같은 것에 시달릴 뿐이었다. 지금 기선제압에 성공하지 못하면 이 대화에서 주도권을 영영 잃을 것 같은 불안이 잘 아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그 주파수가 유독 호소력을 발휘한 탓인지 우진은 아플 만큼 눈에 힘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꿋꿋하게 버텼다. 잠깐이었지만 말없는 긴장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하지만 기세는 곧 사그라들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깨달았다. 서로에게 이토록 적대적일 이유가 없다는 걸. 그것을 깨닫고 나자 오히려 상황은 어색해졌다.
풍선처럼 부풀었던 무언가가 금세 잔잔해졌다는 것을 우진과 오수는 분명히 느꼈다. 오수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어색한 자리를 오래 끌고 싶지 않았다. 뭔가를 얻을 의도도 없던 자리였다. 2년 만에 걸려온 상희의 전화 그 자체가 반가웠을지도 모른다고 오수는 생각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생면부지의 사람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미국에서 건너올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 대상이 자신과 나이대가 비슷한 남자라는 사실에 이유 모를 실망감을 느꼈고 잠깐이었지만 약속을 틀어버릴까 진지하게 고민도 했지만 그게 지금의 어색함을 대변할 이유는 아니었다.
상희는 이제 예전에 함께 살았다는 것 외에는 어떠한 접점도 없는 사이였다.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한 마음은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오수의 유일한 목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오수는 한번 깊이 숨을 골랐다. 속에 차오른 먼지 같은 것을 불어낼 시간이 필요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말문을 열었다.
“최미영이라는 간호사에게서.”
“짐작되는 사람이 있긴 한데.”
우진과 오수는 서로를 바라보며 말을 멈췄다. 우진의 얼굴에 붉은 기가 맴돌았다. 그의 숨이 거칠어지는 것을 보며 오수는 오히려 인상을 찌푸렸다. ‘왜 하필.’ 오수는 정말이지 그 여자의 이름이 지긋지긋했다. 오수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말했다.
“역시 그 사람이군요. 사람 참 안 변해.”
혼잣말 같은 오수의 말에 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진은 낚시꾼이 낚시찌가 가라앉는 것을 보았을 때처럼 다급히 다음 말을 감아올렸다.
“희진 씨라고, 혹시 아십니까?”
오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우진은 급히 덧붙였다.
“같은 병원에서 일했던 간호사라고 들었습니다.”
오수는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다가 엄지와 검지를 펼쳐 입술과 턱을 매만졌다. 우진은 그런 오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왜 그러시죠?”
오수는 찜찜한 기분을 털어버리듯 고개를 한두 차례 세차게 흔든 다음 말했다.
“아뇨. 그냥... 그 사람 이름을 또 듣게 될 줄은 몰라서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오수는 다른 의미로 우진을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어딘지 미심쩍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우진은 커피잔을 집어 들었다.
“병원장과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오수는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렸다.
“병원장님이? 설마…”
“제 아내가 희진 씨를 대신해서 서민철 씨를 신고했고, 그가 구속된 건 사실입니다.”
“아내분이 그 일로 돌아가신 건가요?”
우진은 복잡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배경에 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이유는... 물으나마나겠군요. 아마 최미영, 그 사람이 또 못된 혀를 놀린 거겠죠?”
우진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사실 미영에게 들은 말은 특별할 게 없었다. 미영이 오수의 주소를 알려주기는 했지만 그녀에게서 특별히 오수를 헐뜯는듯한 무언가를 느끼지는 못했다. 하지만 오수가 미영에 대해 어느 정도 적대적인 상황이 우진에게 특별히 불리할 것도 없었다. 오수는 이마를 긁적였다.
“흠… 일단 제 이야기부터 들려드리는 게 순서겠군요.”
오수는 흠흠, 헛기침을 했다.
“제가 그 병원에서 행정실장으로 일했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래전 일이죠. 몇 년 전 병원에 화재가 있었습니다. 그때 아이가 한 명 실종됐죠. 그 사고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아이는 찾았지만 아이 엄마가 사과를 요구했죠.”
“그럼 미영 씨가 그 일에 관여됐던 겁니까?”
오수의 미간에 세로줄이 생겼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쩝 하고 입술을 튕겼다.
“네. 미영 씨는 병원장님 사모님이었습니다. 누구에게 사과할 성격도 아녔죠. 결국 병원장님이 나서서 사과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병원은 왜 그만두신 겁니까?”
“아이 엄마가 상희였거든요.”
우진은 맥이 풀려 기울였던 상체를 뒤로 툭 떨어트렸다. 푹신하지 않은 의자 등받이에 그의 어깨가 닿았다. 그는 잠시 천장을 보다가 카운터 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상희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나가버렸는지도 모른다. 오수가 그를 살피다 말을 이었다.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상희는 제 전처입니다. 그때 제가 집사람을 설득하는 역할을 맡았거든요. 그 일로 더 문제 삼지 않는 걸로.”
“...”
“상희는 장인 어르신과 상의하겠다며 집을 나갔습니다. 몇 번 찾아갔었어요. 한사코 만나주지 않더군요. 지영이만이라도 보여주려고 했는데, 저도 엄마라는 사람이 그렇게 매정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 사람 일을 몰랐던 건 아니지만 순간 정이 뚝 떨어지더군요. 오래 걸리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혼까지.”
오수는 넋두리하듯 말했다.
“여기, 이 건물도 아직 제 명의로 남아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 이리로 찾아오게 되신 걸 테지요. 억지로 등기부 등본과 건물 열쇠 뭉치를 장인에게 전하고 지영이와 떠났습니다. 어쩐지 한국도 지긋지긋하더라고요. 어찌 지내나 궁금하긴 했는데 원래 카페 하던 자리라 제법 잘 꾸며두고 하는가 봅니다. 커피를 좋아하던 사람이었으니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거예요.”
잠시 아련해졌던 오수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었다. 우측 사선으로 내리깔린 그의 시선이 유난히 날카로워 보였다. 비틀려 올라간 한쪽 입꼬리가 누군가를 비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주어가 빠져 있었지만 우진은 그가 미영을 말한다는 걸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사람이 갑자기 달라졌습니다. 히스테리가 시작되자 병원에 걷잡을 수 없이 소문이 퍼졌습니다. 병원에서 가장 오래된 간호사가 밤 근무를 서다가 뺨을 맞은 일이 결정타였어요. 그동안 쉬쉬해오던 일이 수면 위로 급부상한 거지요. 솔직히 골치가 아팠습니다. 병원장님은 다 좋은데 이 사람이 좋은 게 가장 문제예요.”
오수는 애매한 표정을 지우며 손가락으로 머리를 툭툭 쳤다.
“병원장님 대처가 애매하니까 저라도 나서야 했지만... 오너 사모님 문제를 행정실장 차원에서 어떻게 한다는 게 참... 그냥 병원만 안 나와도 문제가 절반은 해결될 텐데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당사자는 당당한 거. 한 달 새 세 사람인가? 그만뒀습니다. 그러자 미영 씨는 자기가 하면 된다며 당직표에 이름을 올려 달라더군요. 그것도 야간으로. 병원장님을 찾아가 봤는데 원하는 대로 해주라더군요.”
오수는 잔을 들어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는 입술을 손등으로 쓱 닦아내더니 잔을 흔들며 안에서 잘그락거리는 얼음을 들여다봤다.
“당장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미영 씨는 유독 밤 근무를 원했어요. 처음에는 도움이 되는 모양새였지만 문제가 있었죠. 미영 씨가 밤새도록 한 아이 근처만 기웃거린다는 거예요. 같이 근무에 들어갔던 간호사가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다며 저를 찾아왔어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