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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Mar 22. 2024

혼자만 나이 들어 보일 순 없으니까

소설

  35. 혼자만 나이 들어 보일 순 없으니까     


  한양 도성 안내 표지판이 보였다. 나는 표지판 안쪽으로 풀을 밟고 들어가 석벽에 손을 댔다. 그러고 있으면 과거가 불쑥 가까워질 것 같았다. 죽은 후에 영혼들은 어디로 갈까. 몇백 년 전 여기 살았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쯤 있을까. 영혼에도 집이 있을까. 영혼도 휴식을 취할까. 영혼들에게도 지연과 학연, 혈연이 있을까. 질문은 불쑥 들어와서 마음에 커다란 구멍을 낸다. 마음에도 한양 도성처럼 성벽이 있다면 지금처럼 자주 흔들리지 않을까. 성벽은 안쪽의 존재를 지키는 동시에 하나의 변하지 않는 틀로 자리 잡는다. 사람들은 둘로 나뉜다. 틀에 순응하는 쪽과 순응하지 않으려는 쪽으로. 어떤 이에게는 선택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강요였을 것이다. 시대에 따라 현실은 사람을 구분하기도 하나로 모으기도 했다. 나는 손으로 석벽을 쓸며 걸어 올라갔다. 뒤를 돌아보았다. 걸어온 거리가 하나의 시대처럼 느껴졌다. 몇 번이나 허물어지고 다시 세웠을까. 풍화되지 않는 믿음은 없다. 역사가 증명한 것처럼 세상은 영구한 통치를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셀카를 찍는 두 여자를 서둘러 지나쳤다. 곱슬머리에 까만 가죽 코트를 걸친 여자가 엄마였다. 모녀는 닮았다. 유전자 검사 같은 걸 하지 않아도 혈연은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엄마는 주름이 예뻤다. 곱슬머리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무스 같은 걸 바른 것 가았다. 딸과 함께여서 그랬을 것이다. 혼자만 나이 들어 보일 순 없으니까. 나는 앞에서 불어오는 실바람을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솔향이 났다.      


  한줄기 청량감이 걸음을 가볍게 했다. 모래주머니를 갑자기 풀어버린 것처럼 평소보다 1미터는 더 높이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진 나뭇가지에 손이 닿자 기분이 좋아졌다. 저 앞으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보였다. 나는 잠시 쉴 생각으로 그곳에 들어갔다. 입구에는 자판기가 설치된 쉼터가 있었다. 나는 벤치형 소파에 가방을 두고 자판기로 가 코코팜을 뽑았다. 자판기 옆에는 팸플릿이 비치돼 있었다. 나는 코코팜을 마시며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안내 부스에는 기념관 운영시간이 쓰여 있었고, 부스 안쪽에는 오십 대 중반의 남자가 신문을 보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동계절 마감 시간은 17시. 아직 2시간 여유가 있었다. 바닥과 벽에 화살표로 관람 방향이 표시돼 있었다. 나는 팸플릿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아주 약간이지만 가방이 더 무거워진 느낌이 들었다. 화살표를 따라 걸으며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독립운동 여정을 눈으로 훑었다. 한쪽 전시관이 공사 중이라 2층 구름다리 앞에서 더 이상 갈 수 없게 돼 있었다. 나는 밖이 보이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 졸음이 몰려왔다. 


  까무룩 잠들었다가 사람들 소리에 깼다. 대부분 그쯤에서 관람을 마치고 엘리베이터로 내려갔다. 나는 계단실로 나갔다. 계단실 벽이 통유리여서 밖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계단실을 나오니 아까 그 입구였다. 출구는 저쪽. 나는 중얼거리며 입구 바로 옆으로 표시된 입간판을 따라 나갔다. 오른쪽으로 남산 타워가 보였다. 표지판에 남산 타워 2km라고 쓰여있었다. 올라가는 길이 그대로 보였다. 가벼운 차림을 한 사람들이 제법 그 길을 따라 오르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올라가는 모습이 꽃동산을 연상케 했다. 멀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가방 무게가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보기보다 멀 것이다. 잔잔한 바다에서도 그랬다. 저 섬 보여? 20년 전 하계휴가 동안 밖에서 인명 구조 자격증을 따온 사관학교 동기 영우가 손가락으로 섬 하나를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영우는 한쪽 손을 밖으로 내고도 힘들이지 않고 물에 뜰 수 있었다. 나는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영우가 쓴 빨간 조교 모자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빨간 모자를 쓴 영우는 작년처럼 같이 훈련받는 대신 바다에 가상의 레일을 만들었다. 우리는 빨간 모자를 쓴 사람들이 만든 레일로 들어가 온종일 수영 훈련을 받았다. 그날은 2주 전투 수영의 마지막 날이었다. 자꾸만 흘러내린 선크림이 눈을 따갑게 했다. 오늘 저기를 갔다 올 거야. 영우의 목소리에도 긴장이 묻어 있었다. 얼마나 떨어져 있을 것 같냐? 나는 잠시 고민했고 그사이 몸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2킬로래, 2킬로. 나는 영우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영우는 말했다. 여기는 정말 미친 것 같아. 밖에서도 단체로 왕복 4킬로 수영을 시키는 곳은 흔치 않을 걸? 정말로 그 섬은 팔다리를 젓고 또 저어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이미 거기를 찍고 돌아올 만큼 수영해 온 것 같은데도 여전히 섬은 그대로였다. 나는 그때를 떠올리며 발걸음을 오른쪽으로 꺾어 남산 도서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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