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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Mar 26. 2024

고칠 수 없는 것을 고치라고 하는 말

소설

  혼자 산책을 하던 엄마가 그만 방파제에서 미끄러져 바다에 빠졌다. 다행히 근처에서 낚시를 하던 아빠가 그 사고를 목격하고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엄마의 목숨을 구한 아빠는 그날 저녁에 심한 몸살을 앓았다. 엄마는 죄책감이 들었고, 그래서 시장에서 닭을 사다가 닭죽을 끓였다. 그날 아빠는 닭죽을 먹다 혓바닥을 데었다. 감기도 걸리고 혓바닥까지 데었으니 책임지라고 아빠가 엄마에게 말했다. "그놈의 닭죽. 그때 괜히 끓여줬어." 엄마는 속이 상할 때마다 아빠에게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윤성희,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밤)




  36. 고칠 수 없는 것을 고치라고 하는 말     


  남산 도서관으로 들어갔을 때 나를 가장 먼저 반긴 건 구수한 밥 냄새였다. 식당 창문에 서서 나는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러나 도서관에서 밥을 주다니. 반가운 느낌이 먼저 들었다. 4천 원 남짓한 식사 비용도 나쁘지 않았다. 요즘 도서관은 몸과 마음의 양식을 모두 채워주나 보다. 학교도 못 하던 일을 이제 도서관에서도 제공하고 있었다. 


  내가 6학년 때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집 바로 건너편에 생긴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고 그해 8월쯤 분양받은 새 아파트로 이사 갔다. 통학 거리는 멀어졌지만 그래도 좋았다. 새 학교에 새집이라니. 나는 공부도 잠도 새것에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다. 이름이 초등학교로 바뀌어서 그런지, 학교에서는 급식실을 짓겠다고 했다. 그리고 증축 비용을 학부모들로부터 갹출했다. 10월쯤부터 급식실이 운영되기 시작했고,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초록불에 뛰어나가다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 직후 나는 스스로 일어나서 걸었고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의 신음과 함성을 들었다. 영웅이 된 기분이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건너편 인도까지 걸어가 턱에 쪼그려 앉았다. 저 멀리 박살 난 오토바이가 보였고 그 뒤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경찰은 나를 부축해 태우고 가장 가까운 응급실로 갔다. 이상하게도 아까는 걸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나른한 가운데 휠체어로 옮겨 타자는 말을 들었고 오른손으로 어딘가를 짚다가 비명을 지르며 허물어졌다. 


  양쪽 무릎인대가 끊어졌고 오른 손목이 바스러졌다. 머리를 안 다친 게 천만다행이라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하는 걸 들었다. 그 덕에 오른 손목뼈가 열세 조각으로 쪼개졌지만 그래도 손은 두 개니까. 그때부터 나는 왼손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쓰고 나서야 알았는데 아빠는 왼손잡이였다. 왼손잡이인 걸 티 내면 차별받는다는 말을 듣고 오른손도 똑같이 쓰기 시작했다고, 아빠는 왼손에 쥔 연필을 고쳐 잡아주며 말했다. 불평하지 말고. 배워두면 다 쓸 데가 있어. 아빠는 불평하지 말라는 말을 습관처럼 했다. 나는 그 말이 아빠의 불평처럼 들렸다. 


  아빠 말처럼 왼손을 쓰는 법을 익히는 건 어렵지 않았다. 완치된 후에도 오른 손목은 이유 없이 쿡쿡 쑤셨다. 힘이 빠지고 쥐고 있던 물건을 자주 놓쳤다. 친구들과 팔씨름을 할 때도 왼손을 썼다. 태생적으로 왼손이 더 힘이 셌다. 왼손으로 하면 열에 아홉은 이겼다. 오른손으로는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오토바이를 탄 사람은 21살 형이었다. 짜장면을 배달하던 중이었고 무면허였다. 짜장면 집에서는 일용직인 그 형을 모른척했다. 형은 부모님과 함께 내가 입원한 병실을 찾아왔다. 합의하지 못하면 형사처벌을 면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엄마는 병원비만 받고 합의해 주었다. 


  입원 후 2주가 지났다. 나는 갇힌 생활이 따분해졌고 링거를 맞는 일이 끔찍해졌다. 양다리와 오른팔에 깁스를 친친 감은 채로 병동 복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간호사에게 주삿바늘을 맞지 않겠다고 떼썼다. 사흘마다 주삿바늘이 막혔고 위치를 바꿔 새로 달았다. 맞는 과정도 끔찍했지만 몸에 이물질을 달고 있는 느낌도 고약하기 그지없었다. 멍든 자리가 망치로 맞은 것처럼 아팠다. 엄마는 징징거리는 나를 데리고 외출을 나갔다. 그리고 마트로 가서 파이어 제이데커를 사줬다. 새 로봇에 눈이 먼 나는 주삿바늘이 박힌 것도 모르고 놀았다. 


  퇴원한 후에도 오른쪽 다리는 매년 말썽을 일으켰다. 결국 연골을 덜어내는 수술을 했다. 왼손에 왼발, 이제 내가 제대로 쓸 수 있는 것은 그 둘밖에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하자 차라리 홀가분해졌다. 오른쪽 무릎을 살짝 굽힌 채 걷는 습관이 들었고 사관학교 4년 중 3년 내내 보행 태도를 지적받았다. 고칠 수 없는 것을 고치라고 하는 말은 내가 더 이상 후배가 아닐 때까지 따라다녔다. 실무에서는 누구도 보행 태도 같은 걸로 시비 걸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오른쪽 다리를 살짝 절 때마다 교통사고를 떠올렸다. 그때 엄마가 일만 안 했어도. 자책하는 엄마가 보기 싫어서 엄마와 같이 있을 때마다 작정하고 똑바로 걸었다. 학교에서 3년 내내 안되던 일들이 그때만 됐다. 그러고 나면 일주일 동안 허리와 무릎이 아팠다.      


  남산 도서관에서 밥을 먹을 수는 없었다. 아내와 우육탕을 먹기로 저녁 약속이 돼 있었다. 어쩔 수 없이 2층으로 올라가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책 보다 컴퓨터와 모니터가 더 많은 도서관. 사람들은 앉거나 누워 태블릿과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귀에 뭔가를 꽂지 않은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옛 열람실을 떠올려 보려던 나는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그나저나 어떻게 할까. 칸막이가 세워진 책상에서 스탠드 불빛에 기대 조용히 책을 보고 싶었다. 3층으로 올라가자 그런 공간이 나타났다. 하지만 빈 곳이 없었다. 벤치형 소파에 앉아 책을 펼쳤다. 4페이지 정도 읽고 자리를 정리했다. 모두들 무언가로 귀를 막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남산 도서관을 나서자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아내와 함께 찾아간 우육탕 가게는 문을 닫았고 우리는 옆 가게로 들어갔다. 조용한 가게에서 여자가 전표를 정리하고 있다가 우리를 보고 일어나 메뉴판을 갖다주었다. 김치 수제비와 칼국수 중 고민하다가 닭 칼국수를 주문했다. 손님은 아내와 나뿐이었다. 얼른 먹고 일어났다. 맛은 그저 그랬다. 출발하자마자 아내는 곯아떨어졌다. 나는 뒷좌석에서 무릎담요를 꺼내 아내에게 덮어주었다. 먼지가 날렸다. 창문을 열자 비냄새가 났다. 곧 차창 위로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와이퍼로 쓱쓱. 와이퍼로 쓱쓱. 토요일이 그렇게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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