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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Mar 27. 2024

그렇게 쳐다보지 마, 정들겠어

소설

  37. 그렇게 쳐다보지 마, 정들겠어    


  눈이 녹은 탓일까. 벽에서 물이 새기 시작했다. 딸아이가 쓰는 방이었다. 벽 모서리와 천정이 만나는 곳 벽지에 얼룩이 져 있었다. 만져보니 축축했다. 윗집에 가서 말해야 하나?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에 아내가 대답했다. 그래야 하지 않겠어? 인정하려고 할까? 안되면 경비실이라도 찾아가야지. 자기가 가기 힘들면 내가 다녀올까? 아내는 그런 일을 잘했다. 잘못을 따져 묻는 일. 잘잘못을 가리는 일. 아내는 판사가 어울렸지만 간호사를 했고 지금은 간호학과 교수가 되었다. 며칠 더 지켜보고. 그래 그럼. 아내가 먼저 출근했고 나는 얼룩을 한참 더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보고 있으면 물 얼룩이 증발하기라도 할 듯이.    

  

  다음 날 딸아이는 퇴근한 내게 찾아와 말했다. 아빠. 저거 말이야. 어제보다 더 커졌는데? 가서 보니 얼룩은 마르기는커녕 더 번져 있었다. 손 끝에 물기가 묻어 나올 정도였다. 이거 안 되겠는데? 나는 위층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안에 계세요? 아랫집인데 물이 새는 것 같아서요. 나는 초인종을 두 번쯤 더 눌러보다가 내려왔다. 뭐래? 아내가 집에 와 있었다. 사람이 없네. 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 아내가 현관으로 나가 신발을 신었다. 뭐 해? 뭐 하긴. 아파트 관리실에 이야기해야지. 거기 가도 사람 없어. 내일 아침에 내가 가서 이야기할게. 그래 그럼. 하지만 아내는 신발을 벗지 않았다. 어디 가? 그냥. 좀 답답해서. 린아, 동생들이랑 저녁 좀 챙겨 먹어. 우리끼리? 눈을 동그랗게 뜨는 딸을 두고 나는 얼른 재활용 쓰레기를 챙겨 아내를 따라 나갔다.      


  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장은 어수선했다. 데굴데굴 구르는 박스 조각과 찢긴 노트 낱장, 자잘한 비닐 찌꺼기가 바람에 날아다녔다. 아파트 주민들은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박스나 커다란 비닐을 낑낑거리며 들고 달렸다. 물 고인 데서 찰박찰박 소리가 나며 구정물이 튀었다. 1층 입구로 나가고 나서야 빗발이 거세졌단 걸 알았지만 아내는 서슴없이 밖으로 나갔다. 나도 후드를 머리에 쓰고 뒤따라 걸었다. 아내는 가끔 화가 나 있었는데 나는 그게 나 때문인 것 같아 노심초사할 때가 많았다. 그러면 아내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너 때문 아니야, 하고 설명하곤 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학생이 한 명 죽었어. 아내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나는 차에서 얼른 우산을 꺼내 와 아내에게 씌웠다. 빗방울이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주 보던 학생이었어. 아내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래서 요즘 과 분위기가 좀 뒤숭숭해. 그 학교에서는 작년에 교수 한 명이 교내 연못에 빠져 죽었다. 나는 아내의 연구실 짐을 옮겨 주러 갔다가 연못을 실제로 가보았다. 크고 예쁜 연못이었다. 연못이라기보다는 작은 호수처럼 보였다. 아내가 단단해 보이는 연못 수면을 보며 말했다. 술 먹고 발을 헛디딘 거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숭숭할 만하네. 떡볶이나 먹을까? 그럴까? 나는 아내의 손에 우산을 쥐어주고 차를 끌고 왔다. 아직 열려있겠지? 없으면 칼국수 먹자. 칼칼한 칼국수. 떡볶이 가게는 파장 분위기였다. 우리는 남은 튀김과 순대를 모두 사고 떡볶이도 2인분 주문했다. 이마에 두건을 맨 남자가 걸쭉한 떡볶이 국물을 긁어 그릇에 담았다. 떡볶이 값은 1인분만 받았어요. 남자가 말했다. 눈과 입술, 얼굴이 동글동글하니 귀여운 인상이었다.    

  

  차에서 아내는 김말이와 오징어튀김을 꺼내 한 입 베어 문 다음 내 입에 넣어주었다. 왜 먹고 나서 줘? 내 맘이야. 튀김은 따뜻하고 바삭했다. 제법 식어서 그런지 뜨겁지는 않았다. 이거 다 먹고 올라가자. 그래. 그런데 튀김옷이 자꾸 떨어졌다. 아내는 입가에 묻은 기름기를 옷소매로 쓱쓱 문질러 닦았다. 그거 아끼는 원피스 아니야? 아, 맞다. 뭐야. 아끼는 옷 맞아? 맞아. 아내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아내의 볼에 붙은 순대 껍질을 떼서 입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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