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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Apr 01. 2024

할머니의 꽃무늬 바지를 입고

소설

  39.     


  할머니의 꽃무늬 바지를 아내는 좋아했다. 할머니 옷을 입으니 마치 할머니가 된 것 같았다. 이젠 엄마가 와도 무섭지 않았다. 아가, 할머니랑 고구마 보러 갈까? 할머니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대문을 나갔다. 아내는 텃밭으로 가는 할머니의 뒤를 따라 걸었다. 할머니는 걸음이 느려서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할머니는 바닥의 수선화 하나도 밟지 않을 것처럼 살금살금 걸었다. 얇은 티셔츠 위로 굽은 허리와 뼈마디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내는 조심스럽게 할머니의 등에 손을 얹었다. 왜? 할미가 안 돼 보이냐. 아니. 아내는 속으로 그렇게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 여린 것을. 할머니는 아내의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주었다. 딱딱하고 마른 손끝에 눈물이 스미며 색깔이 변했다. 서리처럼 하얀 할머니의 손을 아내는 꼭 쥐어 볼에 댔다.      


  기장이 남아 여러 번 접어 올린 바짓단을 아내는 내려다보았다. 바지 안쪽은 하얬다. 허리가 계속 흘러내려 엉덩이골이 보였다. 팬티까지 할머니 걸 입을 수 없어 그냥 입지 않기로 했다. 가뜩이나 바람이 솔솔 통하는 바지를 입고 있으니 가랑이 사이가 서늘했다. 할머니가 고무줄을 새로 묶어 주었다. 아내는 허리춤을 당겼고 얇고 하늘하늘한 바지가 엉덩이에 끼었다. 할머니는 그새 저 앞까지 걸어가 있었다. 느리면서도 빠른 걸음이었다. 따라가 손을 잡는 아내에게 할머니는 혼잣말하듯 말했다. 영심이도 고집이 셌지. 아내는 엄마의 이름이 고영심이란 걸 그때 알았다. 그리고 엄마도 이름이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엄마는 엄마지 엄마가 무슨 이름이 필요해? 아내는 그렇게 속으로 투덜댔다. 너무 미워 마라. 걔도 몰라서 그래. 어떻게 대할지 몰라서. 저를 똑 닮은 사람. 너무 똑같아서 맞기는커녕 매사에 투닥거리는 사람. 저도 처음이겠지. 


  할머니는 텃밭으로 들어가 구부정한 허리를 기대고 앉았다. 고구마들이 줄기줄기 달려 나왔다. 얘네들이라고 알았겠냐. 자기가 고구만지 감잔지. 할머니는 고구마 하나를 뚝 끊어 아내에게 던져 주었다. 아내는 후후 불어 흙을 털었다. 뽀얀 보랏빛 살갗이 드러났다. 아내는 마치 거울을 보듯 고구마의 겉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니까 요게 엄마란 말이지? 어서 삶아 먹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은박에 싼 고구마 7개를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왜 7개야 할머니?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고 빙긋 웃기만 했다. 고구마가 익을 때쯤 엄마가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야! 이 기지배야, 너 여기가 어디라고 혼자 와!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할머니는 씩씩거리는 엄마를 손짓해 불렀다. 됐고, 이리 와서 고구마나 먹어라. 할머니는 은박을 펼쳐 한쪽으로 밀었다. 할머니는 엄마와 할머니 앞에 고구마를 2개씩 놓고 아내에게는 3개를 주었다. 엄마는 군고구마라면 사족을 못 썼다. 엄마는 아내를 매섭게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쉬며 할머니 옆에 앉았다. 아내는 혓바닥을 쏙 내밀었다. 


  이거. 엄마는 할머니에게 두유 한 통을 내밀었다. 할머니는 바로 하나를 까서 빨대를 꽂아 쭉 들이켰다. 아이고, 맛나다. 그러고서는 고구마를 집는 엄마의 어깨를 툭 치며 턱짓으로 아내를 가리켰다. 엄마는 못 이기는 척 두유에 빨대를 꽂아 아내에게 내밀었다. 아내는 쏜살같이 받아 길게 쪽 빨았다. 달큼한 두유의 질감이 좋았다. 바람에 앞머리가 살랑거렸다. 어디선가 아카시아 냄새가 났다. 하루 자고 데리고 가라. 할머니가 말했다. 안돼, 엄마. 쟤 학교 가야 돼. 그럼 혼자 가던가. 천하의 엄마도 할머니한테는 대들지 못했다. 입술을 깨문 엄마의 얼굴이 빨개졌다. 


  점심은 김치전 부쳐 먹자. 할머니는 장독으로 가 재작년 김치를 꺼냈다. 엄마는 이미 따라가서 장독을 구경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뒷모습은 닮았다. 할머니도 엄마가 어려웠을까. 자기랑 너무 똑같아서. 할머니는 김치를 쭉 찢어 엄마 입에 넣어주었다. 미쳤네. 미쳤어. 엄마는 맛있는 걸 먹을 때면 그 말을 했다. 맛있는 음식은 왜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 아내는 아폴로를 앞니로 질겅질겅 씹어 속의 말랑한 것을 빼먹으며 이해했다. 


  그날따라 단짝 수영이가 온종일 저기압이었던 터라 아내는 미치기 직전이었다. 수영이의 고민은 아빠가 자기 이마에만 수염을 긁는다는 것이었다. 이거 남녀차별 아냐? 왜 오빠한테는 안 하고 나한테만 턱을 비비냐고! 너 같으면 너희 오빠한테 턱을 비비고 싶겠냐? 아내가 묻자 수영이는 내가 약 먹었냐? 하고 비명을 질렀다. 거봐. 네가 그러면 아빠도 마찬가지 아니겠니? 수영이는 잠시 표정이 멍해졌다가 도끼눈으로 돌아왔다. 아니, 근데 나한테는 왜 하냐고. 이뻐서 그러시겠지. 이쁘다고? 내가? 넌 내가 이쁘니? 아내는 자신을 똑바로 보는 수영이의 눈을 피했다. 아니. 


  아내는 역시 사춘기 것들은 피곤해,라고 생각하며 매점으로 가 아폴로를 샀다. 작년까지는 100원이었는데 지난 3월부터 200원으로 올랐다. 한 번에 두 배가 뛰다니 말이 되나 이거. 아내는 아빠가 담배 피우는 흉내를 내듯 아폴로를 쭉 뽑아 입술로 물었다. 아, 인생 피곤하네. 아폴로는 서서히 녹으며 입술 사이로 흘러들어왔다. 아내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와 미쳤네. 이거 뭐지? 왜 이렇게 맛있지?     


  엄마는 할머니에게 김치 조각을 하나 더 받아먹은 뒤 아내에게도 가지고 왔다. 아내는 입을 꼭 다물고 도리질 쳤다. 엄마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맛도 모르는 게, 하고 자기 입에 쏙 넣었다. 아내는 분해 할머니에게로 달려가서 나도 먹을래요, 하고 소리쳤다. 할머니는 옆 장독에서 백김치 국물을 떠서 아내 입에 슬쩍 흘려 넣었다. 너한테는 이게 맞다. 백김치 국물에서는 사이다 맛이 났다. 그 모습을 보던 엄마가 허리에 손을 얹고 소리쳤다. 엄마! 나 약 올리려고 불렀어? 내가 불렀냐? 네가 왔지. 할머니는 백김치 국물을 한 술 더 떠서 아내의 입에 넣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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