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1.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는 것
기온은 17도. 일교차가 크긴 하지만 봄이 물씬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폐가의 울타리처럼 메말랐던 길가에 노란 개나리가 폈다. 없던 색이 입혀진 것만으로도 마음이 1도쯤 따뜻해진 것 같았다. 봄의 품격은 색깔이 만들어 주는 모양이다. 새 옷을 입은 것처럼 동산이 각양각색으로 물들면 비로소 어제와 다른 계절이 된다. 변하지 않는 풍경 속에서도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는 것이 지난 4년간 오늘을 살아낸 방식이다.
건너편에는 200평 규모의 세차장이 있다. 재작년 5월에 지었다. 최신 설비를 갖춘 데다 주변에 경쟁 업체가 없어서 그해 여름과 가을은 호황을 누렸다. 나도 가보았는데 하부 세차, 폼 건, 거품 세차, 고압 세차까지 안 되는 게 없었다. 세차 동영상에서 본 것처럼 천장을 빙글빙글 돌며 거품 가루를 뿌리는 설비는 없었지만 근처 셀프 세차장과 차별화가 될 만한 요소는 충분해 보였다. 사장의 세차 솜씨도 좋아 입소문이 퍼졌고 세차장 공터에는 대기 중인 차가 서너 대씩은 늘 있었다. 호황에는 부작용도 있었다. 부스가 가득 차 기다리는 사람이 늘었고 사장은 배짱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예약하지 않은 손님은 매몰차게 거절했고 세차비를 올렸다. 그러다 겨울이 왔다. 손님이 뚝 떨어졌다. 크리스마스 두 배 충전 행사도 하고 온수 무한 제공이라는 플래카드도 붙였지만 뜸해진 손님을 채우지 못했다. 세차 일감도 줄어서 사무실은 불이 꺼져 있는 날이 많았다. 그러면서 균형을 찾았다. 사장은 배짱 대신 매너를 갖추기 시작했고 적당한 만큼의 손님이 왔다.
차들이 세차장으로 줄지어 들어갔다. 지난주부터 하루 걸러 한 번씩 비가 내렸다. 황사를 잔뜩 머금은 비가 내리면 차들은 흙탕물에 한 번 담갔다 꺼낸 것처럼 지저분해졌다. 그런 일을 몇 번 당하고 나면 세차 욕구가 눈 녹듯 사라진다. 어지간히 세차에 중독된 사람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로 황사가 심했다. 오늘은 흐리긴 했지만 비 소식은 없었다. 새벽 4시쯤 눈을 떴을 때는 창가가 촉촉했다. 아스팔트 바닥도 젖어 있었다. 비는 먼지를 머금고 내린다. 밉고 텁텁한 분위기도 뽀득뽀득 씻어준다. 비 내린 아침은 상쾌하다. 너저분한 기분을 정리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세차장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도 비슷할 것이다.
잠시 비가 멎은 틈을 타 데크에 오일스테인을 새로 칠했다. 블랙 색상이 칙칙하긴 했지만 데크 부식을 방지하려면 주기적인 도포가 필수다. 우선 오일스테인을 적당량 덜어 용기에 담고 희석한다. 롤을 거기 담갔다 뺀 다음 흐르지 않을 만큼 탁탁 턴다. 이제 뭉치지 않도록 잘 펴 발라주면 된다. 화공약품 냄새가 심해 절로 눈가가 찌푸려진다. 고개를 돌리자 ‘살균 스팀세차’라고 쓰인 간판 옆으로 구찌 모자를 쓴 사장이 스팀 노즐을 쥐고 차량 주변을 맴도는 모습이 보였다. 세차장 사장이 손을 휘저을 때마다 칙칙 소리가 나며 하얀 증기가 차 구석구석으로 쏟아졌다. 사장의 움직임에는 리듬이 있었다. 리듬을 보고 있으면 노동요로 자주 듣던 S.E.S의 달리기가 생각났다.
지겨운가요. 힘든가요. 숨이 턱까지 찼나요. 할 수 없죠. 어차피. 시작돼 버린 것을.
그래. 할 수 없지. 이미 시작해 버린 걸.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롤러를 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