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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Jun 07. 2024

그런 눈으로

소설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이른 시간이라고는 하지만 겨우 여섯 시 반이다. 아내가 내려준 커피와 크림치즈와 딸기잼을 듬뿍 바른 모닝빵을 먹는 둥 마는둥하다가 입에 물고 가방을 메었다. 


눈을 떴을 때 이미 밖은 환했다. 다섯 시 반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내는 노트북을 펼친 채 거실에 앉아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불을 켜지 않아도 될 만큼 거실은 밝았다. 쌀을 씻으려는 내게 아내는 말했다. 거기 말고 여기 씻으라니까. 아내는 싱크대 하단 수납장에서 스탠 볼을 꺼내 눈앞에 들이민다. 내가 보고 서 있자 아내는 쌀통으로 가 스탠 볼에 계량컵으로 쌀을 퍼담는다. 나는 욕실로 가 옷을 모두 벗고 샤워기 헤드를 바닥에 엎어놓는다. 미지근한 물을 튼다. 따라 들어온 고양이가 혀를 할짝이며 흐르는 물을 마신다. 부러 물이 묻지 않도록 한쪽으로 흘려주어도 고양이는 해로운 것을 밟은 듯 발을 부르르 턴다. 목을 축인 고양이를 욕실 밖으로 내보내고 나는 뒤로 한걸음 물러선 다음 수전 스위치를 틀어 해바라기 샤워에서 물이 나오도록 한다. 떨어지는 물줄기에 손끝을 살짝 대 온도를 확인한 다음 머리를 집어넣는다. 물의 온도를 조금씩 높인다. 수증기가 서서히 짙어지며 거울과 샤워 부스 유리에 성애가 낀다. 한동안 물을 맞다가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몸을 닦는다. 허벅지와 종아리에 남은 하얀 거품과 물기를 손가락으로 쓱 그어본다. 팔다리가 가늘어진 느낌이다. 기분 탓이겠지만. 씻고 나온 사이 아내는 어느새 아침을 차렸다. 아내는 모닝빵을 입에 문채로 노트북 화면을 보다가 물기를 뚝뚝 흘리며 나온 나를 밉지 않게 흘겼다. 닦고 나오라니까. 응. 나는 건성으로 답한다. 나는 몇 가지 지킬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스탠 볼에 쌀을 씻는 것과 욕실 안에서 몸을 닦고 나오는 것. 할 수 없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의 경계쯤에 놓인 것들. 아내는 턱짓으로 빈 의자를 가리켰다. 


여섯 시 반에 집을 나서면서 든 생각은 이 시간대에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다는 자각이었다. 주차장은 한산하리만치 비어있었다. 그 장면은 내게 안도감을 주었다. 피곤함이 한 꺼풀 개어지는 느낌이었다. 바람도 선선하고 차도 달아오르지 않았다. 찹찹한 시트는 그 자체로 청량감을 주었다. 나는 시트에 앉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창문을 끝까지 열고 차의 시동을 걸었다. 


도로 위의 차들은 분주히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나도 그 대열에 어서 합류해야만 할 것 같았다. 아스팔트를 새로 깐 모양이었다. 평평한 도로를 달리고 있으니 마치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하지만 좋은 일이란 뭘까? 적당히 분주하고 적당히 활기찬 도로를 달리는 일이다. 쫓기거나 내몰리거나 다급하지 않게 보내는 하루다. 은행나무 아래를 걷는 일이고 물 댄 논에 비친 석양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러나 좋은 일이란 뭘까. 


카페 앞에 차를 대고 문을 연다. 적막한 실내가 나를 맞이한다. 한동안 입구에 서서 아직 빛이 들지 않아 어두운 공간을 본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게 좋은 일인지 생각한다. 덜컥. 탁. 탁. 나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에스프레소 머신이 소리를 낸다.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와서 두 발로 서서 앞발을 걸치거나 의자 위에 똬리 튼 채로 나를 물끄러미 건너다본다. 고양이는 한 살 밖에 안 된 주제에 세상 다 산 사람 같은 표정을 지을 때가 있다. 어쩌면 나도 그런 눈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가방을 내려놓고 어제 남겨둔 설거지를 한다. 그러다 불을 켜고 뒤를 돌아본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건 좋은 일일까. 그런 생각으로 다시 설거지를 한다. 남겨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커피 한잔을 타서 자리에 앉는다. 커피잔이 따뜻하다. 온기가 통증으로 변할 때쯤 손을 떼었다 붙인다. 입구에서부터 선선한 바람이 분다. 아직은 괜찮다, 아직은 괜찮다,라고 중얼거린다. 그러고 나서 아직은 괜찮다,라고 생각한다. 추위에 몸을 떨듯이 나는 중얼거린 다음 생각한다. 고장 난 공식처럼, 불량품을 끊임없이 찍어내는 기계처럼. 나는 중얼거린다. 뜨거운 커피가 식을 때까지. 손을 떼었다 붙이지 않아도 괜찮을 때까지. 나는 괜찮아.


노래 몇 곡을 연달아 듣다가 끈다. 화분 앞을 서성거린다. 마르고 굽고 끝이 하얗게 변한 잎을 만진다. 물을 줘야 하나 고민한다. 몇 통의 문자를 확인하고 답장을 보낸다. 몇 사람과 인사를 하고 잔을 얼음에 담는다. 잘그락 잘그락. 부러 천천히 담는다. 바닥에 떨어진 얼음들을 본다. 어느새 녹아 흥건해진 얼음들. 거짓처럼 실체가 없는 얼음들. 녹으면 부피가 줄어드는 얼음들. 겨울보다 여름에 더 자주 찾는 얼음들. 나는 건성으로 답한다. 몇 가지 지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하지만 좋은 일이란 뭘까. 고장 난 공식처럼 불량품을 끊임없이 찍어내는 일일까. 물을 뚝뚝 흘리는 채로 욕실을 벗어나는 일일까. 뜨거운 커피가 식을 때까지 손을 떼었다 붙이는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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