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이 예뻤다. 붉고 거대한 보름달이었다. 나는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서 아내를 데리고 오는 중이었다. 아파서 병원에 간 것은 아니었지만 아내는 진료를 기다리던 환자들처럼 긴 의자 한편에 몸을 기대고 물먹은 종이처럼 구겨져 있었다. 움켜쥐면 물이 뚝뚝 흐를 것 같은 모종의 기세로 주변과 분리된 색채를 띄며.
"어디야?"
"6시 48분쯤 도착해."
"응. 난 거의 끝났어. 도비는 이제 자유야."
서울로 향하는 정체된 차들의 행렬 어딘가에서 나는 아내에게 도착 예정시간을 알렸고, 아내는 학회 발표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알렸다. 몸을 상하면서까지 해야 할 일이란 뭘까. 내가 그런 일들로부터 거리를 두려 안간힘을 쓸 때 아내는 그 한가운데에 있다. 정수리까지 푹 잠긴 채로.
"연구 트랙이라 어쩔 수 없어. 그래도 지금 쓰고 있는 논문."
아내는 손가락을 하나씩 구부렸다.
"4개 다 쓰고 나면 부교수 진급에 필요한 논문 점수 다 채운다?"
아내는 조수석에 앉아 부은 발을 주무르며 꽤 희망적인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올 때보다는 조금 한산한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의 미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구두 아직 신지 말라니까."
아내의 새끼발가락은 양쪽 모두 캐릭터가 그려진 밴드가 감겨 있었다. 아내는 보란 듯이 밴드를 살짝 떼서 안쪽을 보여주었다.
"봐봐. 엄청 징그럽지? 아파 죽는 줄 알았다?"
물집이 크게 잡혀 밀린 살갗이 허옇게 떠 있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차는 1차선으로 비껴 탔고 속도를 높여 서너 대를 추월했다.
"밥은?"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못 먹겠어?"
"다 써. 쓰기만 해."
"그래. 가는 동안이라도 좀 자."
보름달이 예뻤다. 붉고 거대한 보름달은 우리가 달려가는 도로 왼쪽 능선에 걸려 있었다. 붉고 둥글고 커다란 보름달은 마치 태양의 잔상처럼 보였다. 낮이 길어졌고 어두워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다. 나는 길어진 하루와 우리에게 남은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아파가면서까지 해야 할 일이란 뭘까. 아내를 이해하진 못해도 위로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막상 고단하고 지친 아내를 보고 있으면 내가 건넬 수 있는 위로가 과연 있을지 알 수 없게 되곤 했다. 위로의 의미와 가치와 방법에 대해서 이미 어떤 한계점에 다다른 건 아닐까.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이불과 베개.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던 열감. 마치 증기처럼 피어오르던 열감. 익숙하지 않은 아내의 땀냄새. 끈끈한 살갗. 그리고 외마디 비명처럼 나를 파고들던 싸늘한 한기. 가장 뜨거우면서도 가장 차가운 느낌이 선득하게 나를 사로잡은 채 밤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씨. 근데."
투정 부리는듯한 아내의 말투가 나의 상념을 깼다.
"케이터링이 왜 없냐고! 디저트나 잔뜩 집어오려고 했는데. 만찬값만 날리고. 쳇."
아내는 그 모든 악운들보다 더 억울한 일을 겪은 것처럼 소리를 꽥 지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게 중요해?"
아내는 동그랗고 선명한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당연하지!"
나는 급격히 허물어지는 어떤 감정을 느꼈다. 제방이 무너진 것처럼 허기가 몰려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로스팅하러 올라갈 때 먹은 라떼랑 자몽 에이드가 전부였던가. 내일은 라면을 좀 사다 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아내에게 물었다.
"냉면 먹을까? 소바도 좋고."
아내는 잠시 숨을 삼켰다. 그리고 터트리듯 말했다.
"와. 미쳤다. 소바?"
아내는 즉시 휴대전화로 집 근처 소바 집을 검색했다. 그리고 우울해졌다.
"8시까지 래."
우리는 동시에 내비게이션 화면의 시계를 봤다. 이미 7시 50분을 넘어가고 있었으므로 실격.
"하긴. 늦긴 했지."
아내는 민첩한 손놀림으로 몇 군데를 더 검색했다.
"여기는 10시까지 한대. 함흥식 냉면. 직접 뽑는데."
"오케이."
아내에게는 먹는 일이 삶의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내게는 그 제안이 무척 반갑게 들렸다. 지난 며칠간 아내는 먹는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고통이란 여러 양상을 띠는 모양으로, 내게는 그런 무반응이 지금껏 보아온 어떤 일보다 거대한 재앙처럼 느껴졌다.
아내는 큰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대략의 도착 시간을 알리고 내려와 있으라고 말했다. 그 사이 거대한 보름달은 능선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다. 붉은 기는 옅어졌고 불완전하던 테두리가 선명해지며 조금 더 어두워진 하늘과 대비를 이뤘다. 38만 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이 천체는 매년 지구로부터 3.8센티미터씩 멀어지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 그런 일들을 계산해 낼 수 있는지 모를 일이지만 문학적으로, 아주 오래전 지구의 생명체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크고 밝은 달을 보았을 것이고, 어떤 관계가 처음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져 간다는 사실은 내게 다른 질감의 위로를 건넨다. 우리의 거리란 지금 유일한 지점에 놓인 것이라고. 어쩌면 지금의 거리는 눈앞의 달처럼 이전에도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볼 수 없을 단 하나의 무언가 일지 모른다고. 만약 아프면서까지 추구할 무언가가 있다면, 내게도, 혹은 아내에게도 그런 단 하나의 무언가였으면 한다고, 나는 밤바다처럼 짙어져 가는 노을을 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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