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랜만에 글을 쓴다. 그러나 오랜만이라는 말은 틀렸다. 태만이 불러들인 결과라고 하기에 오랜만이라는 표현은 너무 정겹다. 그보다는 드문드문이라고 하자. 나는 드문드문 글을 쓰고 있다. 마치 장마가 한창인 7월 첫 주처럼 화사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글을 쓰고 '있다'라고 했다.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은 마당에 마치 무언가가 진즉부터 행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 안도감이 든다. 나를 속이는 짓이다. 그러나 나를 속이는 것 말고 우기의 카페에 앉아 달리 내게 건넬 수 있는 말이 무엇이 있을까. 그러므로 오늘은 탑차 같다. 얼어붙은 무언가로 가득 찬 냉동 탑차. 요즘 내 속은 그렇다. 많은 것들이 얼어붙은 채 저장돼 있다. 바깥과 다소간의 온도차를 지닌 채로. 밖이 아무리 더워도 속은 꽁꽁 얼어 있다. 그러나 '꽁꽁'이라는 말이 차가움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것들은 그토록 얼어붙은 채로 '꽁꽁' 숨겨져 있을 테니.
여기 늘어진 메달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지난여름 피아노 콩쿠르에서 딴 은메달이고 다른 하나는 교내 줄넘기 대회에서 받은 금메달이다. 어느 쪽이 더 화사한가. 중요하지 않은 질문일지도 모른다. 둘 다 현실의 각도를 조금이라도 흐트러트릴 여지는 없으니. 그러나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따지는 게 지금 해야 할 일. 가치라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 무엇이 내게 더 중요한지, 무엇이 내게 더 의미 있는지, 무엇이 더 가질 만한 물건인지, 무엇이 더 간직하고픈 순간인지, 무엇이 더 달려가고픈 목적지인지, 내가 가진 좁쌀만 한 자유로 진정 누려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카페에 앉아 생각하는 것들은 주로 그렇다. 이곳은 피아노와 줄넘기보다 가치 있는 무엇으로 내게 작용하고 있는가. 혹은 '그들'에게 작용하고 있는가. 카페는 내게 소중한 곳인가. 의미 있는 곳인가. 가지고 싶은, 머물고 싶은 공간인가. 기억에 남는 장소인가. 문득문득 달려가 가쁜 호흡을 정돈하고픈 그런 곳인가. 나는 두 개의 메달을 갈무리해 작은 상자에 넣는다. 그리고 안녕이라고 말한다.
몇 개의 달리 흐르는 시간들이 있다. 눈을 감았을 때와 눈을 떴을 때. 잠들었을 때와 잠들지 않았을 때. 누군가를 기다릴 때와 누구도 기다리지 않을 때. 앞을 볼 때와 위를 볼 때. 소설을 읽을 때와 시집을 읽을 때. 라떼를 마실 때와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 입이 텁텁할 때와 입이 텁텁하지 않을 때. 젖은 샌들을 신고 있을 때와 말끔히 마른 운동화를 신고 있을 때. 배가 고플 때와 포만감에 짓눌릴 때. 어떤 상황들 속에서 시간은 달리 흐른다. 어서 지나갔으면 하는 순간은 길고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하는 순간은 짧다. 어떤 시간은 냉장고 속 김밥처럼 퍼석퍼석하고 어떤 시간은 갓 뒤적인 백미밥처럼 포슬포슬하다. 그런가. 하지만 나는 어떤 시간도 선택할 수 없다. 그것은 선택이라기보다는 주어지는 것들의 영역. 주어지는 것들 속에서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이것은 왕뚜껑을 먹느냐, 오징어짬뽕을 먹느냐 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다. 사소한 차이지만 왕뚜껑은 내가 직접 골라온 것이고 오징어짬뽕은 어쩌다 남겨진 것이다. 나는 카페를 직접 선택했고 동시에 어쩌나 남겨진 격이 됐다. 그러므로 카페는 내게 어떤 장소여야 하는가. 어느 쪽의 시간이어야 하는가. 이런 문제는 복잡하다. 결국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의 시간을, 이곳의 가치를.
내게 인생은 살인할 수 있는 것들의 연속이었는데, 여전히 내가 자유인으로 떳떳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대개의 경우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일 것이다. 받아들이기로 한 순간 많은 문제는 잠잠해진다. 아주 약간의 뒤로 물러섬과 거의 티 나지 않을 만큼의 양보만 하면 된다. 매우 쉽고 간결한 일이다. 그저 그 순간을 묵묵히 살아내는 것.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 응. 네가 맞아. 그러면 되겠네. 그렇게 하자. 오케이. 괜찮아. 별로 안 늦었는 걸. 됐어. 나도 방금 왔어. 어떤 거짓을 아무렇지 않게 진실로 덮어두는 일. 어서 그 아수라장을 정리하고 다음 장으로 넘기는 것. 재미없는 페이지는 속독으로 쓱 읽어 넘기고 다음 페이지부터 읽는 것. 받아들이는 것. 아니 지나치는 것. 두 개가 같은 건가 다른 건가. 같은 것이어야 하나, 다른 것이어야 하나.
꽤 오랜만에 글을 쓴다. 그리고 드문드문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생각하는 것과 글을 쓰는 것. 이 둘은 명백한 차이를 가졌지만 어떤 경우에는 선택할 수 없고 나는 내게 주어진 것들을 한다. 그럴 때면 글을 생각하는 것은 글을 쓰는 것이 된다. 기다림은 함께 하는 순간이 되고 눈앞에 없는 이를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시작하지도 않은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카페는 내가 글을 쓰는 장소다. 찰박찰박 발이 물에 잠기는 길을 걸어 올라갈 때처럼, 빗줄기 속에도 나는 비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어느덧 7월이라는 것 역시도. 한해의 반을 보내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나. 무엇을 이루었나. 무엇을 획득했고 무엇을 잃었나. 무엇을 보냈고 무엇을 만났나. 무엇을 가졌고 무엇을 더 가지고 싶은가. 아니, 그런 것들은 없어. 나는 냉동 탑차야. 꽁꽁 숨긴 채 얼어붙어가는 것들이 차곡차곡 쌓인. 언제고 꺼내어볼 수 있을까. 선택할 수 없던 것들 속에서 내가 받아들여온 그 무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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