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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Mar 15. 2024

그래 걷자, 걸으면 되지

소설

  전하고 싶었던 말은 

  결국 전하지 못했고

  웃음만 바라보다가

  태풍에 부러진 감나무 얘기만 하다가

  인사를 나눴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처럼     




  33. 그래 걷자, 걸으면 되지


  나는 아내를 서소문교회에 내려주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내는 강아지처럼 부르르 떨었다. 아내는 꼬리 없는 강아지를 닮았다. 사납고 즉흥적이고 도도하다. 와인색 안경을 쓰고 까만 정장 원피스에 베이지색 코트 차림으로 멀어지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기독간호협회 의결사항이 있었고 아내는 투표권을 행사하러 갔다. 


  나는 서울스퀘어 빌딩에 차를 댔다. 아내가 일정을 마칠 때까지 내게 주어진 3시간을 어떻게 쓸까. 처음의 계획은 운전석에 앉아 ‘연애의 행방’을 읽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거부했다. 조용한 독서는 환영이지만 공간이 문제다. 반층 높이로 쪼갠 성냥갑 형식의 주차타워 안에서는 연애는커녕 실종된 사랑 하나조차 건져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역시 서울이었다. 탁 트인 바다나 한가로운 주차장을 바라는 건 사치라는 생각이 들자 울적해졌다. 서울은 차가 없으면 더 편한 도시라고 전에 친구가 우스개처럼 말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 걷자. 걸으면 되지. 그런 마음으로 차에서 내렸다. 가방은 두고 갈 수 없었다. 가방에는 읽을 책 3권과 수첩 2권이 고정으로 들어 있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공사를 시작하면서 다른 것들을 모두 빼서 무게를 줄였지만 결국 삶에서 덜어내지 못한 질량들이다. 소중해서 더 무게가 나가는 것인지, 무게감으로 인해 더 소중한 것처럼 착각하는지 알 수 없지만. 역시 나는 몇 걸음 못 가 가방을 메고 출발한 것을 후회했다. 늘 겪던 일이었다.     


  내게는 그런 것들이 많았다. 미련함인지 아둔함인지. 펼치지 못할 걸, 말하지 못할 걸, 전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몸과 마음 어딘가에 끝내 담아두는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이루지 못할 걸 알면서도 버릴 수 없는 꿈이 되었다. 일탈을 꿈꾸고 혼자를 꿈꾸고 자유를 꿈꾸고 도피와 망각을 꿈꾸는. 비 온 다음 날 안성천을 넘칠 듯 채우던 검게 변한 강물처럼.     


  대로변으로 내려가자 경찰 스티커가 붙은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웃는 포돌이 얼굴을 한 스티커도, 경찰 마크와 함께 글씨만 크게 쓰인 스티커도 있었다. 경찰은 웃음과 거리가 먼 직종이다. 전에 일했던 직업군인도 그랬고. 고개를 쭉 뻗어도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한 건물. 그 한편으로 ‘서울남대문경찰서’라고 쓰인 큰 글씨가 보였다. 마치 이곳에서만큼은 범죄를 꿈꾸지 말라는 듯 서울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에 세워진 경찰서는 존재감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넓은 도로 건너편으로 서울역사가 보였다. 나는 고개를 틀어 서울역 쪽을 보면서 서울스퀘어 빌딩을 지나 남대문교회로 걸어 올라갔다.      


  오래된 교육관을 지나 사락사락 바스러지는 겨울 풀을 밟았다. 걷다 보니 석조 예배당 앞에 서게 되었다. 이어지는 소로를 따라 걸었다. 을씨년스러운 텅 빈 주차장이 시대를 건너뛴 것처럼 갑자기 등장했다. 주차장에는 경찰 버스 3대가 주차 라인과 상관없이 세워져 있었다. 경찰은 서울 한복판에도 이렇게 차를 세울 수 있구나. 새삼 한기를 느꼈다. 주차장 입구는 쇠사슬로 막혀 있다. 왼쪽에 세워진 거대하고 웅장한 건물은 힐튼호텔이었다. 아, 힐튼호텔 주차장이었구나.      


  힐튼호텔은 영업 정지 상태였다. 암전 된 건물은 꺼진 휴대전화 같았다. 이곳은 이제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서럽고 끔찍한 일도. 정지한 건물 위로 먹빛 구름이 흘렀다. 힐튼 호텔 직원들이 마지막으로 본 하늘도 비슷했을까. 직업군인을 그만두던 날이 떠올랐다. 나는 어떤 마음이었나. 희망으로 들뜨지 않았고 슬프지 않았다. 몇 개의 감정이 교차했고 그중 몇 개는 소거됐다. 목을 조이던 넥타이를 풀어버리고, 치수가 맞지 않던 정복을 벗었다. 마음과 깊은 교류가 이어지지 않는 느낌. 갑자기 불이 꺼진 느낌. 보이던 세상으로부터 추방당한 느낌. 그런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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