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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Mar 12. 2024

지독하게 고요한 곳, 그래서 마음이 투명해지는 곳

소설

  31. 지독하게 고요한 곳, 그래서 마음이 투명해지는 곳    


  공연이 전화를 받고 달려간 곳은 몰운대 바닷가였다. 언덕을 넘어 뒤편 자갈마당으로 가는 공터에 지영이는 잠들어 있었다. 스테인리스 재질의 사각 테이블은 차가웠다. 모서리가 곱게 다듬어지긴 했지만 가까이 손을 대면 쓱 하고 빨간 실선이 그어질 것만 같았다. 그런 밑바탕 위에 평온한 얼굴의 지영이가 있었다.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하게. 숲을 반사하는 스테인리스 재질의 테이블처럼 세상의 소란을 잠재우며. 공연은 눈물이 또르륵 흘렀다. 양팔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었다. 마르지 않는 아픔이 온몸을 찔러왔다. 빗소리인지 바람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쏴아 하고 들렸다. 나무가 흔들렸고 새가 지저귀었다. 지독하게 고요한 곳, 그래서 마음이 투명해지는 곳. 공연은 지영이가 왜 이곳에 잠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지영이의 손에는 메모장이 구겨진 채로 쥐어져 있었다. 공연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쓰인 메모장이었다. 공연은 지영이와 두 눈을 꼭 맞춘 채 말한 적이 있다. 지영아. 어딜 가든 꼭 선생님이랑 같이 가야 돼. 혹시 선생님이 없으면 이 종이를 절대 잃어버리면 안 돼. 알았지? 지영이는 풀린 눈으로 바닥을 쓸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영이는 약속을 지켰다. 고마울 뿐이다.      


  공연이 지영이를 데리고 집에 도착한 것은 밤 8시경이었다. 시간이 너무 흘렀고 공연은 얇은 니트 차림이었다. 어지럼증이 몰려오고 몸이 떨렸다. 식사를 언제 했더라. 지영이의 어머니가 반겼다. 선생님. 죄송해요. 고생 많으셨죠? 못난 딸 때문에. 아니에요. 어머니. 제가 더 잘 보살폈어야 했는데. 지영이의 어머니 이름은 민자였다. 송민자.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간호사 일을 했다. 후송 중 구급차가 마주 오는 차를 피하다 전복됐고, 구급차 운전수와 환자는 즉사했다. 민자는 홀로 살아남아 반신불수가 된 자신을 저주했다. 목숨을 끊으려던 민자 옆에 지영이가 늘 앉아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지영이. 엄마가 사라져도 모를 지영이. 엄마 곁을 떠나지 않는 지영이. 심지영이 민자를 살렸다. 복슬이 모녀를 맡게 된 것은 그다음이었다. 그날 복슬은 돌아갈 시간이 지났음에도 민자 옆을 지키고 있었다. 지영이를 데려가 씻기고 저녁을 차렸다. 공 선생님도 이리 와 같이 잡숴요. 그럴까요? 공연은 마다하지 않았다. 그럴 힘도 인내심도 모두 고갈된 지 오래였다. 복슬은 이렇게 말했다. 어유. 내가 아니면 누가 챙겨. 어유.      


  공연은 사흘 동안 몸살을 앓았다. 39도. 38.8도. 39.1도. 해열제가 듣지 않았다. 열이 내리지 않는 거울 앞에 서서, 공연은 허옇게 뜬 얼굴을 바라보았다. 물을 묻히고. 또 물을 묻히고. 얼굴을 문지르고.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차가웠다. 이렇게 차가운데 열은 그대로였다. 체온계가 잘못됐나. 끙끙거리며 팩에 얼음을 담아 간신히 침대로 왔다. 이마에 올리자 소스라치게 차가웠다. 차가움이 가실 때까지 공연은 이를 악물었다. 몸이 떨렸다. 차가움은 열을 내리는 게 아니라 더 올리는 모양이다. 한동안 아는 욕을 모두 하다가 까무룩 잠들었다 깬 건 새벽 1시. 겨우 30분 지났다. 차라리 나가서 걷자. 부슬부슬 떨리는 몸을 이끌고서 공연은 손에 집히는 대로 옷을 걸쳤다. 땀에 절은 속옷을 벗고 앙상한 가슴과 갈비뼈와 골반을 바라보았다. 손에 닿는 곳마다 따끔거렸다. 통증에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 만큼. 티셔츠, 목도리, 코트. 젖은 앞머리. 자꾸만 내려와 시야를 가리는 앞머리. 넘겨도 넘겨도 흘러내리는 앞머리. 지긋지긋한 직모. 바지는 왜 안 보이는 거야. 


  거리에는 3집 걸러 하나씩 미용실이 있었다. 당연히 모두 문을 닫았다. 공연은 미용실을 하나씩 지나치며 창에 붙은 포스터를 보았다. 얼굴을 이리저리 돌린 모습들. 매끈한 머리. 풍성한 볼륨. 어깨 윗단에 딱 떨어지는 컬. 그들은 웃고 있었다. 공연은 민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영이와 닮지 않은 눈매. 매섭고 분명하게 표적을 직시하는 눈동자. 민자에게서는 운동성을 송두리째 도둑질당한 이의 절망을 찾을 수 없었다. 공연은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어쩐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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