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하얗고 투명하지만 그 너머를 허락하지 않는 눈은, 와이퍼로 닦아내는 것이 무색할 만큼 무자비하고 신속하게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차창 밖은 물을 쏟은 수채화처럼 흐릿했다. 실재와 허상이 뒤섞이는 과정을 나는 먼 과거의 일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친구의 소식을 12년 만에 들은 것처럼, 현재를 현실과 연결 짓는 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편지에 어떤 말이 쓰였는지 봉투를 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편이 나았다. 발송 즉시 수신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지금은 봉투와 편지지의 구분이 무색해졌다. 사소한 무지가 설렘을 자극하던 어떤 날들처럼, 손 닿지 않는 이에게 무언가를 전할 방법이 손 편지뿐이었을 때만 나눌 수 있었던 감정들이 떠올랐다. 봉투를 뜯고 여러 번 접힌 편지지를 펼치는 동안 어슴푸레 비치던 자국. 손으로 만져지는 빼곡한 글씨들. 잘 받았을까 전전긍긍하다가도 지금쯤이면 도착했겠지, 하는 안도가 찾아온 시점부터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우편함을 들여다보던, 그런 낭만들에 대하여. 기약 없는 기다림은 그리움으로 바뀌어 갔고, 기대와 떨림 또한 극에 달해 갔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잦아들지 않아 잠 못 들던 밤과 당장 그에게로 달려가고픈 성급함. 그리고 열정. 그의 문장에 담긴 동질의 그리움과 만져질 것처럼 선명한 문장이 메아리치던 행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모든 것이 응결된 하나하나의 덩어리들이 길고 흰 줄기가 되어 세상을 수놓는 모습이 장관처럼 펼쳐지곤 했다. 하늘을 보며 나는 잠들고 싶다는 꿈을 다시 품을 수 있었다. 인생에 단 한번 영원히 잠들 순간을 정할 수 있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날을 택할 것이다.
내가 공원으로 발길을 돌린 것은 그 순간이 마치 구원처럼 느껴져서였다. 책장을 넘기다 오래된 엽서를 발견한 것처럼 안부는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전해지기도 한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모든 것이 달라 보였던 것은 혼자라는 사실이 더 명징해진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캄캄하던 방문을 열었을 때 쏟아져 들어오던 햇살과, 발바닥 끝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 하나가 내가 진실로 혼자임을 고집스레 대변했던 것처럼, 차라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가 나았다. 어떤 말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전해진 언어와 끝내 닿지 못한 언어들이 무엇이었는지, 내내 궁금증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빛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드러나고 마는 것들. 어떤 것들은 알고 싶다고 주장하면서도 눈을 돌렸고, 두려움은 빛이 더 많은 공간을 비출수록 더 확실해졌다.
가야 할 곳으로 향하던 길을 빠져나와 가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향할 때 느껴지는 해방감은 일시적이지만 확실한 사치였다. 아무도 보지 않는 영화를 극장에서 홀로 볼 때 느껴지던 여유와 고독. 내가 의무에 집착했던 것은 그것이 편해서라기보다 해야 하는 일을 해내지 못했을 때 몇 배가 되어 옥죄일 자괴감 때문이었다. 현재의 일부가 미래에 저당 잡혔고 예기 불안이 찾아왔다. 일정 이상의 불안이 모이면 그것은 고통이 됐다. 하지만 아침까지만 해도 낌새조차 없던 하늘에서 갑작스레 폭설이 쏟아지고 있는 오늘이 그 의무감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날 수 있는 최적의 날이라고, 나는 내게 말했다. 설명할 일 없는 당위가 내게는 필요했다. 한두 줄의 수공예품 같은 변명들이라도 그 속에 들어있을 것처럼 나는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경품 추첨 상자에서는 어떤 번호라도 나오기 마련이니까. 내게 주어진 현실을 대변할 수 있는 말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나는 세상이 떠나갈 만큼 큰 목소리로 그것을 읊을 준비가 돼 있었다.
* 표지 : 7월의 무궁화. 현덕면 논길 어딘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