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1 국어 시간이었다.
교과서에는 작은 삽화가 실려 있었다. 아기를 업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 아기는 기쁜 듯 두 손을 활짝 펴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교과서 삽화를 보고 농담을 던졌다.
“엄마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잘 알 수 있죠? 이 아기를 보세요. 글쎄, 손가락이 아홉 개밖에 없어요.”
그 선생님은 아마도 몇 년 동안 똑 같은 농담을 했으리라. 진짜 자세히 보니 손가락이 아홉 개네, 화가가 그림 그리기 귀찮았나 보다. 아이들의 이런 리액션을 기대했으리라. 자신의 농담에 깔깔 웃는 모습을 상상했으리라.
그런데, 그 날 선생님의 농담에 우리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오히려 분위기는 당황스럽게 가라앉았다.
왜냐면, 손가락이 아홉 개인 친구가 정말로 우리 반에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이 뽀얗고 선이 고왔던 그 친구는 늘 목소리가 힘없이 작았다. 그 목소리마저 여간해서 듣기 어려웠다. 부족한 손가락이 그 친구를 소극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어린 우리지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이 던진 아홉 개의 손가락 농담, 그 친구는 울음을 터뜨렸다. 폭발하는듯한 울음이었다. 그 울음은 수업시간 내내 계속되었다.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랐던 선생님은, 울음을 외면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수업을 진행했다.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선생님은 빠르게 교실을 벗어났다. 그러나 친구의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 날 하루가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왜 수십년이 지나서까지 그 날의 일이 생생히 기억날까? 농담을 던질 때 선생님의 과장된 목소리와 손짓, 그 아이의 우는 옆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무심함이 죄악이 될 수 있을까? 사려 없음이 공격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 백 사람이 모여 있다는 것은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백 개의 세계가 모여 있다는 뜻. 무심함과 사려 없음이 내 의도와 다르게 죄악과 공격이 될 수 있다.
한발 한발, 한마디 한마디에 사려를 담아 조심조심 살아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