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도 May 16. 2021

살구야 나갈까?

방황할 줄 모르는 인간을 산책시켜주는 강아지

나는 그저 우리집 강아지 살구를 위해 산책을 해왔다고 생각했다. 살구가 잔디 위를 껑충껑충 고라니처럼 뛰어다닐 수 있게, 멀리서부터 불어온 바람 냄새를 충분히 맡을 수 있게. 

어느 일요일 오후에는 긴 낮잠에서 땀에 젖은 채로 깨어나 찬물을 얼른 마시고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더위 탓인지 방 안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밖은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비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상쾌해 보였다. 살구야, 나갈까? 내 옆에서 날 물끄러미 보던 살구가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뛴다. 에휴, 어쩔 수 없지. 살구 네가 이렇게 나가고 싶어 하는 걸! 나가자.

우산을 깜빡하는 바람에 비를 맞으며 살구와 아파트 단지를 뱅글뱅글 돈다. 하얀 축구 반바지에 하얀 양말, 하얀 티셔츠에 상투를 튼 추노 머리를 하고. 비를 맞으며 터덜터덜 걷는다 살구와 함께. 목덜미와 이마를 때리는 굵은 빗방울이 시원하고 기분 좋다. 얼마 만에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비를 맞아보는 거지? 

살구가 없었더라면 사람들의 눈치가 보였을 차림과 행색이다. 올 화이트에 비를 맞고 주변을 맴맴 도는 사람이라니. 생각보다 사람들은 낯선 이의 존재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나는 눈치를 봤을 것이다. 살구 덕분에 나는, 강아지가 산책을 재촉하는 바람에 우산도 챙기지 못할 정도로 급하게 나와서 어쩔 수 없이 말도 안 되는 차림으로 이 비 오는 저녁을 배회하는, 납득이 갈 만한 모습이 되었다.


살구는 나이가 많은 강아지다. 그래서 살구가 원하는 건 웬만해선 다 해주는 편이다. 그중 하나가 산책 코스인데, 살구는 다른 강아지들도 다 그러하듯 발길 닿는 대로 다닐 뿐이다. 목적지도 없고, 그래서 가장 빠른 길도 없다. 막다른 길에 다다르기도 하고, 갔던 곳에 또 가기도 한다. 지하주차장을 통과하면 비를 맞지 않고 1분이면 집에 도착할 텐데 살구와 나는 돌고 돌아 비를 맞으며 아파트 단지를 따라 난 경사진 오르막길을 올라간다.


평소에 늘 확실한 목적지와 효율적인 방법을 찾다 보니, 나는 뜻 없이 서성이는 방법을 잃어버렸다.(서성이기조차 '방법'을 고민하다니!) 살구가 나를 이끌어주는 바람에, 고민 없이 방황할 수 있었다. 뭔지 모를 무언가를 한참 응시하느라 그저 서 있는 살구 옆에 쪼그려 앉아서 달팽이를 구경하기도 하고, 갑자기 바쁘게 뜀박질을 하기도 한다. 인도도 차도도 아닌 그런 애매한, 용도나 목적 따윈 없는 그런 공간에 멀뚱히 서 있기도 한다. 그러다 왜가리도 보고 구름도 본다. 

처음에는 발걸음도 시선도 방황한다. 방황하다가 곧, 나도 살구를 따라 발길 가는 대로 눈길 가는 대로 서성인다. 이제는 방황이 아니다. 서성이기 자체가 목적이 되고 그 목적도 곧 사라진다. 그저 여기서 존재하고 숨 쉬고 있을 뿐이다. 


살구가 산책을 시켜준 덕분에 상쾌해진 마음으로 집에 돌아간다. 살구야, 내일도 데리고 나가 줄 거지?

작가의 이전글 2020년 마지막 등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