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걸음새가 있으니까요

마지막 글 [아, 또 깜빡깜빡했습니다]

by 도유영

"유영님, 또 멍 때리세요?"


20대 중반, 첫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던 시절. 그저 유영하듯 떠밀리듯 흘러가던 때였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 보자는 마음에서 시작했다. 흔들리지 말자, 곧게 내 길을 가자 다짐하기만 여러 번. 진득하게 뭐 하나 해보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탄스러웠다. 일기장조차 시작할 때 끝까지 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내 안에 남은 마음을 다 꺼내고 나면 더는 쓸 게 없을까 봐 두려웠다. 그래도 하나씩 꺼내 적었다. 지난 글들에 대단한 사유는 없었지만, 스스로를 조금씩 알아가는 데엔 충분했다.


깜빡깜빡.


삶은 늘 그런 식이었다. 고장 난 전구처럼 내가 쓰임새가 있을까 싶은 순간들. 시간이 흘러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이 짧은 글에 마침표라도 찍을 수 있게 됐다. 파편적인 이야기들을 나만의 시선으로 붙잡아두려 했다. 끝맺지 못한 이야기는 마음 한편에 남는다. 이 글을 완성하지 못했다면 나는 여전히 그 짐을 들고 다녔을 것이다.


"유영님, 오늘 유독 멍을 자주 때리시네요."


회사 휴게실에 앉아 멍하니 창을 보고 있었다. 창밖이 흐리다. 빛이 비치는 줄도 모르고 앉아 있다가야 오늘이 흐린 날이라는 걸 알아챘다. 분명 아침에 일어났고, 밥도 먹었고, 누군가에게 웃기까지 했는데 마음 한쪽은 눅눅했다. 설명하려니 말문이 막힌다.


요즘은 아주 사소한 것에도 마음이 흔들린다.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친 뒷모습, 주머니 속 구겨진 영수증, 아침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빛. 별일 아닌 것들이 마음을 건드려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가 있다. 그럴 땐 내가 살아온 시간이 허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조금씩 비워지고 틀어지고 무뎌지는 사이 또 하루를 건넌다.


해는 지고 밤은 찾아오고 우리는 다시 잠에 들고 눈을 뜬다. 하루를 건너는 일이 얼마나 큰 용기인지 예전에는 몰랐다. 아무 일 없이 버텨낸 날들이야말로 얼마나 귀한 시간을 품고 있었는지 이제야 조금 알겠다.


삶이란 넘어지고 흔들리면서도 자기만의 속도로 ‘알맞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배웠다. 불완전한 채로, 어설프게, 때로는 엉뚱하게 살아간다. 그것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모양새가 오히려 자연스럽다.


어찌 매일 걷는 걸음이 늘 같은 걸음새일 수 있을까. 어떤 날은 빠르게, 어떤 날은 비틀대며, 어떤 날은 겨우 한 걸음. 조금 삐뚤고, 투박해도 정성껏 내딛는 걸음에는 생각보다 많은 다짐이 숨어있다. 우리가 걸어온 이 길은, 서툴렀던 걸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스꽝스럽게 걷는다 놀려도 괜찮다. 길이라 불러오는 것은 놀림받던 걸음들이 한 번, 두 번 다져온 것들이다. 길이란 결국 흔적이 반복되어 생기는 것이다.


누군가는 내게 묻는다. 나아지고 있느냐고. 나아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덜 아프게 받아들이는 법을, 애쓰지 않고 하루를 건너는 법을 배우고 있을 뿐이다. 실수해도 괜찮다고, 잊어도 다시 기억하면 된다고, 마음속에서 스스로를 다독이는 목소리를 조금씩 키워가고 있다.


그렇게 살아간다. 특별하지 않은 하루를 버티고, 어떤 날은 놓치고, 어떤 날은 웃으며 산다. 내일이 어떤 날일지는 몰라도 비틀거리며 오늘을 살아낸 나를 조금은 아껴주기로 다짐한다.


생각을 곱씹다가, 그 다짐이 진지해 보여 피식 웃고 말았다.

"아, 또 깜빡깜빡했습니다."




그동안 혼돈 에세이 『아, 깜빡깜빡했습니다』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다른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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