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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rge Lutens Sep 18. 2023

<872>

기대를 내려놓았더니 뜬금없이 찾아온 메시지. 감정을 보이지 않으려 오직 글자만 적힌 모습이 그 자체로 이모티콘이 되어 초조하게, 그리고 무심한 척 나의 답장을 기다리지. 손에 쥔 맥가이버 칼을 내려놓고 내 감정을 면도하여 전달했어.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거야.


변한 것도 많지만 그대로인 것도 많아. 여전히 불확실한 것들을 마주하고 있는 건 그대로야.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맛있는 것을 몰래 꺼내먹으려 까치발을 들며 부엌을 돌아다닌다는 것, 음식이 없어도, 누군가에게 들켜도 괜찮아. 배만 좀 고플 뿐, 돌아갈 침대는 있어서 참 다행이야. 끌어안을 수 있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어.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는 바보는 아니란 걸 깨달았고, 차이를 받아들이기로 했지.


이제 나는 너의 헤이즐넛 버터를 먹어도 되고, 더는 네가 나의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몰래 먹고 사놓을 필요가 없어. 수없이 느끼고 느낄 원한, 질투, 증오, 시기. 그건 맛있는 음식에 녹여 꿀꺽 삼켜버리고 머쓱하게 웃어버리면 될 일이더라.


굳게 서로 닫혀있던 마음을 풀어줄 비밀번호를 마침내 찾았어. 그 수치만큼 우리는 다르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는 오직 두 사람만 풀어낼 튼튼한 자물쇠를 같이 만들자. 그 수치가 우스울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누구도 풀어낼 수 없도록. 무한한 파이처럼, 다 알고 있는 맛들로 의미없는 텔로미어를 마구 늘려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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