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독을 들이다

by 머무는바람

"아고, 야이네 잘 있어신게. 이 수박 보라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엄마의 눈길은 텃밭에서 떠날 줄 몰랐다. 일주일 간의 병원 생활을 하면서도 장마가 온다는데 고추랑 오이들은 어떨지, 살짝 넓은 잎으로 가려 놓은 앙증맞은 애기 수박은 괜찮을지, 물은 잘 주고 있는지, 애꿎은 조카만 탓하며 수술한 당신보다 더한 걱정으로 마음을 졸이던 차였다. 입원실 밖으로 과랑과랑한 햇볕만 보면 야속타 하시며 비가 와야 저 반려 채소들이 힘들지 않을 텐데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정작 당신은 수술 후 방귀가 나올 며칠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면서도 말이다. 그 걱정이 용케도 전해졌는지 엄마가 없는 일주일 사이 반려 채소들은 쑤욱 자라 있었다. 별 감흥 없이 대하던 내 입에서도 “어이구 야이네 봅서. 이렇게나 컸다고?” 하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다소곳하던 컨테이너 텃밭은 마음껏 팔 벌리는 오이와 수박 덩굴을 빨래집게로 빨래 널듯 잡아줘야 할 정도로 나름 무성해졌다. 구멍 숭숭 벌레 먹은 잎에 애달파하던 고추 모종은 엄마의 근심에 마음을 돌렸는지 제법 튼실한 고추를 내주어서 엄마의 안도감을 자아냈다. 노란 꽃 아래 잔가시로 무장해서 존재감을 뿜어대던 오이는 여기저기 길쭉길쭉하게 늘어선 모습이 또 어찌나 자랑스러워 보이는지.


그중 단연 으뜸은 애기 수박이었다. 애기 수박임에도 연한 줄무늬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던 녀석. 어느 날 집에 들른 나에게 엄마는 목소리마저 작게 소곤대며 커다란 잎을 들춰내며 말씀하셨다.

“요거 보라이. 요거 수박 열매 맺으난 이렇게 잎으로 숨겨놧쪄, 사람들 못 보게.”

이렇게 소곤댈 일인가 싶으면서도 나의 목소리도 함께 한껏 작아진다.

“무사? 무사 야인 여기다 곱쳐둬수과?”

“이거이, 저기 올레 할망이라 조천할망이랑 자꾸 왔다 갔다 하멍 베려봐 부난 저 오이 맺었던 거 안 컴시녜. 겅허난 요 수박은 잘 곱쳐 뒀주.”


그런 사연 때문에 엄마는 집에 오자마자 애기 수박부터 확인한 것이었다. 커다란 잎을 살짝 들자 세상에나! 손가락 한 마디만큼 하던 애기 수박이 야구공만큼이나 토실토실해져서는 의젓하게 컨테이너에 몸을 기대고 있는 게 아닌가.

"아고, 야이네 잘 있어신게. 이 수박 보라이.“

그렇게 엄마의 눈이 탄성처럼 빛났다. 잘 있어준 열매들이 대견하고 그 사이 꼬물꼬물 부지런히 자라준 것에 대한 기특한 마음이 가득 담겼다. 여든 다섯 해 엄마의 시간은 요만큼이라도 살아내기가 얼마나 힘들고 애를 써야 하는지 충분히 알기에 저 열매들의 노고를 단박에 알아챈다. 무엇에 건 측은지심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력, 연륜이다.


”이거 보라이. 제일 먼저 열었던 요 오이는 영 크질 못하고 말라부럼시녜. 아고야 사람 눈독이 영 독한 거로구나. 기주게, 사람들도 다 겅허는 거주.“

여든 다섯 엄마는 사람 눈의 독기를 이제야 큰 깨달음으로 얻은 듯 내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눈독을 들이다’라는 말은 왠지 음흉스러웠구나. 남의 것일지라도 욕심껏 자기가 취하고자 할 때 주로 쓰였구나. 이제 쉰 해를 살아가며 아직은 마음력이 부족한 딸도 텃밭 철학에 빠져본다. 사람 눈이 갖는 선함, 혹은 독함의 선택은 사람 그 자신일 터. 무엇을 보더라도 쓰다듬듯 바라보자. 함부로 독기 뿜어내지 말고 살자. 엄마의 컨테이너 텃밭에선 반려 채소와 함께, 사는 일에 대한 태도와 응원이 이 여름 내내 반짝일 것이다. 엄마의 퇴원과 반려 채소들의 초록에 더없이 편안한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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