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나의 아버지
나는 장사익이 부르는 '연분홍 치마'와 '하늘 가는 길'을 즐겨 듣는다. 청주 예술의 전당으로 장사익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장사익은 잘 모르고 있다가 남편의 카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알았다. 그러다가 KBS 가요무대 독일 공연에서 그가 부르는 ‘연분홍 치마’를 듣고 좋아하기 시작했다. ‘꽃이 피면~~’하고 치고 나가는 그의 노랫가락 소리에 아득히 들려오는 나의 아버지의 장송곡이 담겨 있다.
아버지의 장송곡은 어릴 적 동네에 장례가 나면 늘 들을 수 있었다. 막걸리 한 사발 걸쭉하게 들이키고 불러재끼는 구슬픈 아버지의 장송곡은 듣는 사람들을 곡하며 울게 했다. 어린 나는 장례 집의 제사떡을 얻어 가지고 커다란 나무가 있는 언덕 위(산소벌퉁이)로 올라간다. 아버지의 무대를 한눈에 보고 싶어서다. 상여꾼들이 나란히 상여를 메고 발맞추어 앞서면, 그 뒤로 하얀 소복을 한 유족들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따른다. 또 그 뒤로는 동네 사람들이 망자의 남은 찌꺼기를 집어 들고 따르듯 따라간다. 또 그 뒤로는 저승길이 무언지 아득하기만 한 동네 아이들이 구경삼아 장난 삼아 뒤를 따른다.
그 맨 앞에 상여 머리맡에 아버지가 올라타고 있다.
아버지가 요령(搖鈴)을 흔들며 구슬프게 선창으로 “이제 가면 언제 오나~”하면,
상여꾼들이 “어이허이~ 어이허이~” 하고 후렴을 한다. 나도 후렴을 따라 부른다.
나에게는 상여 속 주인공이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의 구슬픈 장송곡이 좋았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는 막 40에 접어들었다. 장송곡을 부르기에는 젊은 나이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그 일을 하시는 걸 싫어하셨다. 딸인 나는 그 소리를 좋아했다.
나의 아버지는 가난했다. 가난이란 흔히 물질의 결핍이거나 궁핍을 생각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진 물질도 없으면서 욕심까지 없었다. 열심히 벌어 집을 마련한다거나 아이들 잘 가르쳐 보람된 부모가 되거나 하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잘 살면 그만이었다. 이런 아버지의 생활태도는 평생 어머니의 싸움거리였다. 어릴 적 오빠와 나는 하루 걸러 되풀이되는 싸움구경을 했다. 돈벌이도 못하면서 날마다 술타령 한다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구박덩이였다.
사실, 아버지가 돈 못 벌어오는 무능력한 가장은 아니었다. 저임금의 막노동판에서 몸을 쓰며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노동자였을 뿐이다. 필수적으로 써야 하는 돈보다 벌어오는 돈이 적으니 항상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더 벌고 싶어도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으니 시골에서는 지게로, 도시에서는 막노동판의 등짐으로 몸을 쓰는 일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런 데다가 욕심까지 없으니 아버지의 가난은 진작 포기를 해서이거나 태생인 듯했다.
아버지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아버지 밑의 여동생과 큰 형님의 손에서 컸다. 정확히 몇 형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제일 큰 형님이 거의 아버지뻘 되는 나이였다. 큰 형님이 해수병으로-폐암이 아니었을까 한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둘째 형님의 집에서 기거했다. 학력은 겨우 국문 정도 읽을 정도였다.
전해 듣기로는, 아버지의 아버지는 잘 나가는 지관(地官, 묘지나 택지를 선정할 때 그 지질과 길흉을 판단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녀를 여럿 두고 단명을 하는 바람에 가난해졌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아서인지 아버지는 사자(死者)와 관련된 장송곡을 잘 불렀다.
아버지는 열여덟 나이 전쟁 통에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일사후퇴 때 피 토하는 병든 큰 형님을 모시고 피난길에 나섰다가 이천쯤에서 더 이상 가지 못했다. 식구들만 보내고 큰 형님과 도자기 가마에서 은신을 했다. 텅 빈 마을을 밤에 몰래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구해다가 형님의 병구완을 했다. 결국 큰 형님은 피난에서 돌아오자마자 명을 달리했다. 큰 형님이 죽자마자 열여덟 아버지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얼마 동안을 열이 나고 피를 토하더니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죽을 거라고 거의 포기할 때쯤 깨어났다.
전쟁이 끝나자 둘째 형님 댁의 밥그릇을 줄이기 위해 군대를 갔다. 전쟁 끝난 가난한 나라의 군대생활이란 궁핍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아버지의 말대로라면 주먹밥으로 버티며 행군을 하다가 군인들이 배가 고플 때쯤이면 군가를 불러 배고픈 것을 잊게 했다고 한다. 집에 가면 더 배가 고프니 휴가 갈 처지도 못되었다.
제대 후 형님의 농사를 도우며 농사꾼으로 마을에서 농사 날품팔이를 했다. 잣 따는 계절이면 지게를 지고 험난한 산속으로 들어가 잣을 땄고, 모내는 철에도, 가을걷이철에도 청년 아버지의 직업은 날품팔이였다. 천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유가 없어도 낙천적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난 것은 흔한 중매였다. 아버지의 사촌 형수님을 통해서였다. 어머니는 축령산 넘어 모네 골짜기 윤씨네 7남매 중 둘째 딸이었다. 위로 오빠 셋과 언니 하나, 밑으로 여동생과 쉰둥이 남동생이 있었다. 산더덕이며 산나물을 해다 팔아 가산에 보태는 걸 재미 삼았던 형제 중 유독 부지런하고 성실한 처자였다. 애당초 아버지의 성정과 맞을 턱이 없었다. 혼인하고 서울 해방촌에서 신혼살림을 꾸렸다. 누구의 백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버지의 직업이 잠시 우체국 직원인 적이 있었다. 잠시 동안 안정된 신혼생활을 보냈지만, 5.16 직후 그마저도 잘렸다. 마땅히 서울에서 할 일이 없다 보니 다시 시골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가난으로 인한 어머니의 고생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해서든 아이들이 배곯지 않도록 밤, 잣, 나물, 과실을 찾아 산으로 들로 찾아다녔다. 나의 기억으로는 어머니는 한시도 편히 앉아서 먼 산을 보거나, 아랫목에 누워 낮잠을 자거나, 동네 아낙네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거나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면 그럴수록 아버지와의 다툼은 거세어졌다. 입에 풀칠만 해도 만족하며 막걸리에 창부타령을 불러 재끼는 아버지와는 물과 기름이었다. 그 덕분에 오빠와 나는 고학(苦學)을 미덕으로 삼았다.
아버지가 유언처럼 나에게 남긴 이야기가 있다. 배에 재물을 많이 싣고 가는 부자와 빈털터리지만 공부를 많이 한 선비가 탔는데, 배가 풍랑을 만나 부자는 싣고 가던 재물을 잃게 되어 빈털터리가 되었고, 공부를 많이 한 선비의 지식은 고스란히 머리에 남았다는 이야기다. 요는,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얘기다. 그리고는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을 덧 붙였다.
나는 가난해도 아버지가 좋았다.
거나하게 취한 막걸리 냄새도, 싸구려 담배 냄새도 좋았다.
50대 도시의 막노동판에서 시멘트 가루를 마시며 마지막 등짐을 지며 건축자재에 묻혀 단잠을 주무시던 나의 아버지...
도서관 가는 딸을 위해 새벽밥을 해서 도시락을 싸주시던 아버지...
어렵게 공부하는 딸을 위해 양말 속에 꾸깃꾸깃 넣어 두었던 천 원짜리 몇 장을 건네시던 아버지...
육체적 고달픔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채, 밤이면 딸에게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아버지...
무엇보다도 이야기꾼이며 철학자였던 아버지가 좋았다.
부모 없이 살아가야 했던 소년 시절 이야기, 전쟁 통 피난 이야기, 배곯던 군대 이야기, 나 태어날 때 이야기... 밤늦도록 이어지던 이야기의 꼬리를 붙들고 나는 잠이 들었다. 나의 아버지의 이야기는 어린 딸에게 동화의 나라였다.
아버지의 장송곡은 아들 ‘개천에서 용내기’를 위해 상경하면서 끝이 났다. 그로부터 20년여 년 후 아버지가 60세 되었을 때, 당신이 누군가를 위해 불러주던 장송곡 한 자락 듣지 못하고 회한(悔恨)을 품은 듯 암 덩어리를 몸에 품고 세상을 떠났다.
늦었지만, 아버지를 위해 장송곡을 불러 드린다. 장사익의 ‘하늘 가는 길’이다.
간다 간다 내가 돌아간다
왔던 길 내가 다시 돌 아를 간다
어 허아 어허야 아~ 어 허아 어허야 아~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잎 진다 설워마라
명년 봄이 돌아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한 번간 우리 인생 낙엽처럼 가없네
어 허아 어허야 아 어 허아 어허야 아
하늘이 어드메뇨 문을 여니 거기가 하늘이라
문을 여니 거기가 하늘이로구나
어 허아 어허야 아 어 허아 어허야 아
하늘로 간다네 하늘로 간다네
버스 타고 갈까 바람 타고 갈까
구름 타고 갈까 하늘로 간다네
어 허아 어허야 아 어 허아 어허야 아 아 ~
하늘로 가는 길 정말 신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