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의 고향은 ‘모네 골짜기’다. 방학이면 나도 외가 집인 그곳에 가곤 했다.
마장동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가다가 청평발전소 못 미처 북한강변 경춘가도 아스팔트 길 한복판에서 내린다. 차가 별로 없던 시절이라, 위잉~하는 버스 소리가 강과 산사이로 울려 퍼진다.
아스팔트 길 건너에 경춘선 철로가 지나가는 굴다리가 있었고, 굴다리 밑을 지나면 좁고 가파른 골짜기 길이 나온다. 길 따라 초가집들이 뜨문뜨문 이어져 있었다. 골짜기 길은 길었지만 풍경에 취해 오르다 보면, 딸 셋과 아내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난 셋째 외삼촌 집이 나온다. 어찌 그리 일찍 세상을 떠났는지는 아는 바가 없다. 어렴풋이 셋째 외삼촌의 외모가 기억난다. 마른 체형에 반듯한 외모와 부드러운 품성을 지녔다. 딸들은 미남형인 아버지를 닮아 예뻤다.
조금 더 숨이 차도록 오르면, 가장 꼭대기에 확 트인 골짜기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외갓집이 나온다. 대청마루에 앙상한 몸을 드러낸 누런 난닝구(러닝셔츠)를 걸친 외할아버지가 곰방대를 물고 그림처럼 앉아 계신다.
70년대 말 그곳에 기도원이 들어서면서 마을의 흔적이 사라졌다. 어머니는 시집가기 전까지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더덕이나 나물을 캐다가 청평 장에 가져다 판 이야기
오빠들 몰래 싸리나무 담장 구멍으로 청평에 있는 예배당에 가려다 들켜 경을 친 이야기
태생이 천사 같았던 창모 삼촌 이야기
모네 골짜기에서 겪은 전쟁 이야기도...
전쟁이 터졌을 때 어머니는 두 갈래 머리의 열세 살 소녀였다. 어느 날, 완장 찬 동네 머슴과 청년들이 몰려와 외할아버지에게 총을 들이대고 아들들 숨은 곳을 대라고 위협했다. 그들은 외할아버지를 피붙이처럼 따르고 외삼촌들과 형님 아우 하며 지낸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바닥 빨갱이’라 했다. 깡마른 외할아버지의 가슴팍에 총을 들이대던 그 사람들에게서 어린 어머니는 살기를 느꼈다고 한다.
“어떻게 하루아침이 사람이 그렇게 변할 수 있는지 원!
나는 아버지를 부등 껴안고 울 아버지 죽이지 말라고 울며불며 애원했어,
너무너무 무서웠어!”
집안을 뒤지고 땅을 파 봐도 찾을 수 없자 사람을 주둔시켜 감시했다.
큰 외삼촌과 둘째 외삼촌은 인민군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진작 축령산으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소녀 어머니는 소쿠리(나물바구니)에 밥을 싸가지고 산에 나물 캐러 가는 척하면서 감시를 피해 오빠들한테 먹을 것을 날랐다. 산속 깊숙이 숨어 있는 곳 근처에서 신호를 보내면 어디선가 서로 다른 곳에 은신하고 있던 머리털과 수염이 덥수룩한 오빠들이 나와서 먹을 것을 받아 갔다. 그러기를 여름이 다 갈 때까지 했다. 그동안 동네 사람들 여럿이 죽어나갔다.
가을이 되면서 군경이 들어왔고 오빠들은 산에서 내려왔다. 큰 오빠의 팔에 완장이 채워졌다.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인민군들이 새까맣게 산으로 후퇴했다. 어머니는 굶주린 소년 인민군이 너무 불쌍해 보였다고 한다.
이윽고 어린 어머니는 청평 발전소 아래 백사장에서 벌어진 ‘학살’을 목격했다.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곱게 입은 여인들, 반듯한 청년들, 아기를 업고 아이 손을 잡은 엄마, 학교 선생님 그리고 할아버지한테 총을 들이댔던 동네 머슴까지, 일면식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청평댐에 올라가 먼발치서 봤는데...
꾸러미로 엮듯이 세끼 줄에 묶여 줄줄이 끌려오는 사람들을
나란히 세워놓고는 그냥 순식간에!
아이고오~ 그 일만 생각하면 정말 지금도 치가 떨려!”
발전소 밑 강물이 시뻘게 질 때까지, 청평 일대의 잘난 사람들이 씨가 마를 때까지, 어린 어머니는 주검을 봤다. 피로 물든 강의 물고기도 같이 죽어갔다. 맑은 강과 산골짜기가 온통 피비린내로 물들었다. 어머니는 그 후로 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
어머니의 전쟁 기억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중공군이 밀고 내려오면서 1.4 후퇴가 일어났다. 큰 외삼촌의 인솔 하에 동네 사람들이 추운 겨울날 피난길에 나섰다. 청평발전소 아래 꽁꽁 얼어붙은 강을 걸어서 건넜다. 팔당을 지나 남한강을 건너 이천, 장호원을 지나 진천까지 갔다고 한다. 피난 후 돌아온 집은 메뚜기 떼가 지나간 자리처럼 황량했다. 그 자리에 다시 삶의 터전을 지어 살았다.
나는 어머니에게
“큰 외삼촌도 사람을 죽인 적 있어요?”
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어머니는
“아니, 느이 외삼촌은 절대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 절대로!”
라며 손사래를 치며 강하게 부정했다.
전쟁이 끝난 후, 큰외삼촌은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식솔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 막노동자가 되었다. 그리고는 부모님을 서울로 모셔올 때까지 고향땅을 밟지 않았다. 맨 정신일 때의 큰외삼촌은 한량없이 자상하고 매너가 있었다. 술만 먹으면 180도로 사람이 바뀌었다. 큰 외숙모는 거의 매일 폭력 속에 살아야 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어머니의 울부짖는 소리에 식구 모두 잠에서 깨어났다. 나랑 같은 학년이었던 5학년짜리 외사촌이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전날 저녁 돌아가셨다”며 울먹였다.
외삼촌은 전날 저녁에도 여느 때처럼 만취상태로 집으로 가기 위해 어두운 아스팔트 길을 건너고 있었다. 그를 미처 보지 못한 버스가 그냥 지나가 버렸던 것이다.
그의 나이 마흔아홉이었다.
제노사이드를 목도하고 감성이 상해 버린 모네 골짜기의 소녀... 상한 감성에 사상의 컴플랙스까지 덧입힌 채 수십 년을 살아온 나의 어머니를 보면 가슴이 아려온다.
어디 나의 어머니뿐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