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워서 달라질 수 있었던 시간
“미안하지만 올해도 안될 것 같아요.”
3월 어느 금요일, 대리 승진에서 또 떨어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벌써 두 번째다. 지난번엔 아이 임신과 휴직 이력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상사여도 나를 승진시키기는 어렵겠다’라는 생각을 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정말 회사가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내가 능력이 없어서 직장에서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당연히 진급이 될 거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더 그랬다.
다음 날 쓰린 마음을 붙잡고 나는 가족과 함께 친정엄마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지방 친정 집으로 내려갔다. 그렇지만 마음에는 온통 승진에서 떨어진 생각과 우울한 감정뿐이었다. 두 분에겐 너무 부끄러웠지만 이런 마음을 또 누구한테 토로할까 싶어 엄마 아빠께 내 상황과 마음을 털어놓았다. 엄마는 내 얘기를 조용히 들어보더니 이런 얘기를 했다.
“니 억울한 마음은 다 이해해. 우리도 3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어보지 않았겠니. 조금만 참고 버텨보자.”
엄마에 이어 아빠가 조용히 본인의 이야기를 꺼내었다.
"아빠는 말이야. 처음 은행에 취직해서 정말 일을 열심히 했고 인정도 많이 받았단다. 그래서 승진도 굉장히 빨리 했어. 30대에 지점장을 달았다니까. 반면에 그 당시에 나랑 같이 입사했던 한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었지만 운이 나빴어. 그래서 남들이 다들 가기 싫어하는 한직에서 빙빙 돌고 당연히 승진도 잘 되지 않았어.”
“그래서요?”
“회사가 어려워지자 지점장들이 먼저 잘리기 시작했어. 나도 정리해고를 당했지. 그런데 그 사람은 직급도 낮고 별 볼 일이 없다 보니 그냥 그대로 회사를 다녔어. 그리고 회사 사정이 나아지자 리더들을 더 세워야 했는데, 이미 지점장들을 모두 정리해고 한 바람에 인재가 없어서 그 사람이 임원이 되었어. 지금 그 사람은 네가 들으면 알만한 기업의 회장이 되었지. 지금은 남들이 너보다 먼저 가는 것 같아도 나중엔 네가 더 빨리 갈 수 있단다. 인생은 모르는 거야."
아빠의 말씀을 듣고 나니 쓰린 마음이 좀 진정되었다. 사실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마다 '왜 남들은 제 속도로 잘 살아가는 것 같은데 나만 이렇게 뒤처질까?’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반대로 내가 잘 될 때에는 '나만 왜 이렇게 잘 풀리지? 내가 왜 이렇게 남들보다 빠를까?' 하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다. 자신에게 닥친 여러 상황에 대해 감사하기보다는 불평하기가 훨씬 쉬우니까 말이다.
사람마다 인생의 속도가 있겠지. 내가 저 사람보다 조금 느리다고 늘 느리게 가지는 않을 거다. 어쩌면 이런 비교 자체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모두 다른 모양의 인생을 살고 있고 그래서 출발선도 목적지도 다른 레이스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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