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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이담 Apr 07. 2021

할머니의 할머니는 둘이었다.

02 내 할머니의 어린 시절

내가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나는 얼마만큼 알고 있을까?


나는 할머니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거의 모르고 있었다는 게 맞았다. 할머니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나를 놀라게 했다. 아마 오늘도 할머니는 내가 알지 못하는 재밌는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가실 지도 모르겠다.




할머니: 내 이름은 내 아빠가 지어줬지. 사람들이 시(時)는 잘 타고났다고 했어. 남자로 태어났으면 큰 일을 할 팔자라고 그랬는데. 범띠거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그걸 믿으면 안 되지만 시를 타고난다고 하는 게 어느 정도는 맞나 봐. 동대문 시장에서 혼자서 장사한 것 보면 참 용감해. 높은 산도 겁내지 않고 잘 다녔고. 그리고 어딜 가든 자꾸 리더를 시키더라고. 사람들이 자꾸 나보고 주동자 역할을 하라고 맨날 그랬어. 


그러면서 인터뷰는 쭉 이어졌다. 할머니의 어릴 적 추억에 대해 물어봤다. 


할머니: 어려서는 너무 호강하고 잘 자랐지. 할머니가 둘이고.

나: 엥? 할머니가 둘이라고요?

할머니: 응. 큰 할머니가 아기를 못 낳아가지고, (자)손을 보려고 둘째 할머니를 얻었어. 그때 내 할아버지가 재산을 많이 모아서 잘 사셨거든. 같은 집에서 할머니 둘이 사셨는데. 둘째 할머니가 4남매를 낳았어. 딸 셋에 아들 하나. 내 아빠가 3대 독자였지. 그 아버지가 나를 낳았으니 내가 얼마나 귀염 받았겠니. 나는 두 할머니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지.


내 예상과는 달리 부인이 둘인 집이었어도 갈등은 없었다고 했다. 두 분이 서로를 잘 보듬어 가며 사셨다고 했다. 드라마는 드라마이지 현실은 아닌가 보다. 둘째 할머니가 오래 사셔서 큰 할머니 장례까지 치러주셨다고 한다.




할머니: 그렇게 옛날인데도 아주 싸나운 애가 있었어. 누구고(누구든지) 돈 많고 잘생기고 저보다 공부 잘하고 그러면 전부 다 미워하는 거여. 아주 싸나워서 욕도 잘하고 그러니까 애들이 전부 무서워 혀. 뭐를 줘야 잘할 것 같아서 그 시골에서 옛날에 줄 게 뭐 있어. 누룽지 긁어다가 몰래 주고 그랬던 생각이 나. 


고무줄 뛰기 같은 거 하다가 저 안 끼워 주면은 막 뭐라고 하고 때리고 그랬어. 나도 싸나운 사람 있으면 무서워가지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설설 기고. 졸업할 때까지 애들 괴롭히는 데 1등 노릇하는 애가 걔였어. 


나: 그랬구나, 그 때나 지금이나 학교에서 일진들은 있었나 보네요.


할머니: 그렇지.


할머니는 내게 종종 삶의 지혜 같은 것들을 이야기해주시곤 했다. 예를 들면 너무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처음에는 이 말을 이해하질 못했다. 


'어떻게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잘 되기를 빌어줄 수가 있지?'


그런데 할머니는 나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그러면 마음이 신기하게 편안해진다고. 속는 셈 치고 정말 그 기도를 해봤다. 이 사람이 잘 되게 해 주세요. 마음이 편하고 하는 일도 다 잘 되게 해 주세요. 신기하게도 내 마음이 먼저 편해졌다.


인터뷰를 하다 보니 할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기질이 있지 않았나 싶다. 만약 내가 어릴 때 이런 '싸나운 애'를 만났다면 나는 뭔가를 뺏기거나 욕을 먹은 것만 기억하고 속상해하며 울었을 것이다. 그런데 할머니는 아무것도 줄 게 없으니 누룽지라도 갖다 줬다고 한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나름의 지혜를 발휘해서 상황을 피해 갈 수 있도록 했다는 말인 것 같았다.


이야기를 한참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말이 끊겼다.


할머니: 너 그거(인터뷰) 그러면 할머니한테 뭐 줄 건데?
나: (뜨끔했다. 거기까진 생각 못했는데 일단 둘러댔다.) 책이 나오게 되면 50권 사서 드릴게요. 친구 분들에게 나눠주세요.
할머니: (농담이셨던 듯) 그래 알았어~

나: 네 알겠어요. 할머니 이제 시간도 늦었는데,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할머니: 그래 잘 자라.

나: 안녕히 주무셔요.


보상이라니 이런 부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농담이시긴 할 테지만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데 책은 정말 언제 나올 수 있게 되려나. 전자책은 할머니가 이해를 못하실 것 같고, 진짜 종이책이 나와야 할머니한테 들고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큰일이다. 


이번 인터뷰집은 정말 허투루 쓰지 말고 열심히 써 봐야겠다.


Photo by eberhard grossgasteig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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