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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고삐를 바짝 쥐는 방법

일 년 뒤의 나를 생각해 보기

by 서이담

경주마가 달린다. 눈에는 안대 같은 걸 쓰고, 마치 눈앞에 좁아진 시야가 내 세상의 전부인 양 달린다.


직장에서의 나의 모습도 그렇다. 다른 모든 것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앞만 보고 달린다. 그 앞이 내 세상 전부인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그래서 일이 흔들리면 세상이 흔들리는 듯한 기분이 들어 어떤 날은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왔다 갔다 한다. 그러기를 10여 년, 이제는 나름의 기술이 생겼다. 감정이 흔들릴만한 일이 생기면 친구에게 연락을 하면서 하소연을 한다.


“나 오늘 이런 일도 있었다.”


“어이구. 고생했네.”


“근데 말이야. 이 일은 일주일 지나면 기억도 못하겠지?”


“당연하지.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넘기자 넘겨.”


“그래. 오늘도 알려줘서 고맙다.”


“별말씀을. 너한테 말하면서 나도 다시 기억해서 좋지.”


오늘 나를 괴롭게 했던 일은 1년이 지나면 생각도 나지 않을 일이라는 걸 깨달으면 마음이 좀 가라앉는다. 아니 일 년이 무어냐. 일주일 뒤에도 생각나지 않을 일이 태반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눈앞에 놓여있는 괴로움이 한껏 작아진 느낌이다.


며칠 전에는 일을 하다가 함께 선배가 자꾸 미워졌다. 선배는 꼼꼼한 사람이었는데, 그 꼼꼼함이 지나쳤다. 혼자만 꼼꼼하면 좋겠는데 그 기준을 자꾸 나에게도 강요했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수준까지 하기를 바랐다. 하루는 참지 못하고 은근슬쩍 들이받았다.


“제가 괜히 시키신 일을 했나 봐요. 제 일만 많아지는 걸.”


“아니… 이건 이 수준까지 해야 한다니까. 상사도 그걸 원할 거라고.”


“그런가요… 허허”


애써 괜찮은 척을 했지만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 선배와 일을 같이 하는 게 피곤했다. 내가 평정심을 잃고 이런 마음을 입 밖으로 표현했다는 사실도 괴로웠다.


그날 꿈에 전 직장에서 함께 일하던 동기가 나왔다. 동기 중에서도 나와 같은 부서로 입사를 했던 친구였다. 어버버 하고 눈치 없었던 신입시절 나와는 달리 입사초기부터 똑 부러지게 자기 할 일을 잘했던 친구라 같은 부서 사람들이 대놓고 비교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눈앞에서 사람을 비교하는 선배들을 미워했었어야 했는데, 그때의 나는 그 친구가 부러운 마음에 질투도 나고 시샘도 했다. 나중에는 함께 힘든 시절을 보내며 점점 끈끈한 전우애와 동료의식이 커졌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날 꿈에서는 어쩐지 내가 또 그 친구를 질투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 기상알람이 울리기 전 눈이 떠졌다. 옆자리에 있던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여보.. 나 꿈에 미나가 나왔어.”


“응? 미나가?”


“응… 내가 다시 미나를 질투하고 있더라고.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참 후회돼. 그때 난 왜 더 잘해주지 못했을까.”


“그땐 어렸잖아.”


“그래. 어렸지.”


동기를 떠올리고 나니 문득 어제 미워한 선배가 생각이 났다. 먼 훗날, 아니 1년 뒤, 내가 그 선배와 헤어져 다른 부서로 가게 된다면 나는 그 선배를 더 미워하지 못했던 걸 후회하게 될까? 아니면 내가 그 선배에게 더 잘해주지 못했던 걸 후회하게 될까. 30 몇 년간의 나의 후회의 히스토리를 훑어보자면 반드시 후자였다. 나는 그에게 못되게 굴었던 내 자신을 창피하게 여기게 될 것이 뻔했다.


출근을 했다. 아침부터 선배는 지난주에 타 부서의 하이에나가 선배를 물어뜯어서 힘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내게 해주었다.


“아이고. 그러셨구나. 정말 잘 참으셨어요.”


나를 지치게 하는 이 사람도 역시 누군가에게 치여서 힘들어하는 그냥 보통 사람이었다. 짠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도 선배는 여전히 똑같은 태도로 자기 기준을 들이밀었다. 나는 좀 달라졌다.


“오 선배님, 그렇게 디테일한 부분까지는 제가 생각을 못했네요. 감사해요.”


“뭘~. 내가 좀 더 경험해서 알게 된 거지.”


선배는 으쓱하며 내게 이야기했다. 나는 선배가 하라고 한 일들을 반은 하고, 반은 하지 않았다. 성격 급한 선배는 내가 하지 않은 나머지 반을 알아서 채웠다. 다행히 선배는 내 칭찬 덕분인지 기분 나쁜 기색이 없었다. 잘 넘어가고, 잘 굴러갔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편해졌다.


1년 뒤의 나는 어떤 걸 기억하게 될까.

1년 뒤의 나는 어떤 걸 후회하게 될까.


이렇게 생각하면 바짝 다가갔던 현실에서 조금은 뒤로 물러나 여유 있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이 키워지는 것 같다. 그리고 그 힘이 키워져 마음의 중심이 잡히면 비로소 내가 고삐를 단단히 쥐고 인생이라는 말을 잘 달리게끔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장애물은 피하고, 진흙탕은 뛰어넘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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