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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 James Jan 25. 2024

누군가 자고 있다

2024.1.25.


"아, 얼마나 놀랬는지 몰라.

 그날만 생각하면..."

"그니까. <기생충>이 따로 없었지.

 우리한테 그런 일이 생길 줄이야."

T와 K는 바다가 보이는 거실 테이블에서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지금이야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물론 즐거운 웃음은 아니지,

당시에는 놀라움과 두려움이

한가득이었는데.


10년 차 부부인 두 사람은

일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그건 서로를 묶어준 유대감이자

서로에게 소홀해지는 계기였다.

그들은 약혼할 때 부부 서약서를 썼다.

둘은 아이 없이 재미있게, 눈치 보지 않고

살기로 했다. 부채를 포함한 모든 자산을

내역별로 정리했고 3년, 5년, 10년 및

평생 단위의 계획도 명시했다. 

이는 계획형 인간 T가 주도했고

K도 호응했다. K는 종합건강검진을 받고

결과를 서로 확인하고자 했다. 

T는 조금 망설였지만 동의했고

대신 둘이 살 집을 고르기로 했다.

계획이라는 게 항상 뜻대로 되지는 않지만

그들은 용케 하나씩 이루어갔다.


두 사람은 함께 하는 시간만큼

서로만의 여유도 중요시했고

각자의 꿈을 존중하고 응원했다.

작디작은 결혼식을 올리고

채 2년이 지나지 않아

K는 유학길에 올랐다.

T는 1년 휴직을 내고

 K 뒷바라지를 했다.

힘들고 궁핍했지만

미래를 그리며

버텨냈다. 

가끔 그때를 떠올리면

그들은 풋풋한 감성에

빠져들곤 했다.


K는 한국에 돌아와 작은 꽃집을 열었다.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이색적인

꽃과 포장으로 바쁘지만

보람찬 날들을 보냈다.

바쁜 연말을 마무리하고

K가 새해맞이 버킷 리스트를 쓰다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날 위해 희생해 줘서 참 고마워.

 내가 꿈꿔오던 일을 지금 할 수 있는 건

 다 당신 덕분이야."

"당신이 열심히 산 결과지 뭐.

 나도 함께라서 좋았어."

"사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여행도 제대로 못 가고 둘만의 시간도

 별로 없었던 것 같아. 생각해 봤는데

 우리 약혼 때 당신 소원 중 하나였던 거

 지금 해보자."

"어떤 거?"

"우리만의 별장 갖기, 어때?"


세컨드 하우스. 

그래, 그건 T의 로망이었다.

이젠 K의 소망이기도 했다.

주거용 집 외에 

언제든지 놀러 갈 수 있는 집, 

복잡한 생각은 놓아두고 

경치를 즐기며 쉬다 올 수 있는 집.

두 사람은 후보지를 물색했다. 

제주도에 세컨드 하우스를 짓고 

틈날 때마다 내려가 지내기로 했다.

올 때마다 여기에 집 있으면 좋겠다던 

말이 이루어지는구나. 신기하다.

도심에서 너무 멀지 않으면서도 

천혜의 자연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3달에 걸쳐 답사하며 발품을 팔아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았다. 

무엇보다 바다와 마주한 

아담한 테라스가 좋았다. 

이제 제주도 올 때는 

숙소 걱정 안 해도 되겠네.

환하게 웃는 T를 보며 K도 기분이 좋았다.

관리 문제가 있었지만 비거주 주택 전문 

관리업체에 맡기니 편리했다. 

꼼꼼한 관리로 믿음이 갔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제주집에 갈 때는 미리 업체에 연락했다.

그런데 그날엔 두 사람이 계획에 없던 

새벽 비행기를 탔다. 

T가 남해 바다가 그립다기에 

둘은 기습 여행을 떠났다. 

웬만한 건 집에 있으니까 몸만 가면 되지. 

공항에 도착해 잠깐 쉬었다가 렌터카를 

첫 타임으로 빌려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해, 어수선한 테라스,

뭐야, 제대로 관리 안 하는 거야.

떨리는 두 걸음이 현관에 닿았다. 

모르는 신발 두 개가 나뒹굴고 있네.

K는 업체에 연락을 했고 T는 집을 뒤졌다. 

안방문이 닫혀 있다. 침 한 번 삼키고

소리 나지 않게 문을 열었다. 

암막 커튼에 휩싸인 침실, 

아, 그곳에서 누군가 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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