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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 James Jan 26. 2024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

2024.1.26.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New 퀴즈>의 Y입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새해인데요,

 오늘의 출연자는 아주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오셨다고 해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지 궁금합니다. 

 큰 박수로 맞이해 주세요."


집에서 OTT로 볼 때는 

배경이 카페나 스튜디오였던 것 같은데

이번 연말 특집은 방송국에서 촬영했다. 

그것도 좋지. 난생처음 방문해 본다.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동선을 맞추고

잠시 뒤, 눈앞의 미닫이문이 스륵 열렸다. 

방송 장비는 참 신기해. 

반짝이는 무대가 펼쳐졌다. 

M은 멋쩍지만 자연스레 걸음을 옮겼다.

방청객들의 환호와 박수가 어렴풋했다. 

아, 겨우 자리에 앉았네. 


"반갑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대하시는데,

 시청자분들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사전인터뷰 때 멘트를 정한 것 같은데

하나도 기억이 안 났다. 

나중에 방송을 보니

언제 그런 말을 했나 싶다.

내가 말을 한 건지, 

내 안의 누군가가 대신 말한 건지 몰라도

아무튼 시작은 잘 넘긴 것 같다. 

"오늘의 주제가 말이죠,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입니다. 

 아, 첫 주자로 나오셨는데

 떨리지는 않으시나요?"

당연히 떨리지, 왜 안 떨리겠어요. 

조명이 생각보다 엄청 밝고

카메라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목이 바싹거리는데 물 좀 더 마실걸.

진정하자, 잘할 수 있다. 

"네, 조금 떨리지만 이렇게

 출연하게 되어 기쁘고 감사합니다."


올해는 M에게 특별한 해였다. 

작은 회사에 다니던 소시민 M은 

쳇바퀴 도는 삶에 지쳐가고 있었다. 

지금껏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허전함은 눈덩이처럼 날로 커져갔다. 

뭔가 돌파구가 없을까 고민하다가 

학창 시절 좋아했던 책 읽기와 글쓰기를

해보기로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는 거의 

손을 놓고 지냈어. 안타까웠다.

하루는 반차를 내고 

근처 서점을 갔는데 마음이 편했다. 

내키는 대로 책을 읽다 보니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다.

그날부터 하루에 글 한 편씩 쓰기로 했다. 

처음에는 노트에 끼적이다가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브런치스토리라는 플랫폼도 알게 되었다. 

둘러보니 좋은 글이 많았다. 

삼고초려로 합격해 본격적으로 글을 썼다.

대가 없이 시작한 일이지만 참 즐거웠다. 

내일은, 또 그다음에는 어떤 글을 쓸까

행복한 고민이 일상을 채워나갔다.

하루는 M이 그동안 쓴 글을 책으로 내면

어떻겠냐고 한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아,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떨리는 마음으로 출간 준비를 하고

3달 뒤 그의 이름이 새겨진 책이 세상에 나왔다. 

처음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첫 책이 이대로 잊히나 싶었는데

한 유튜브 채널에서 소개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책 판매부수도 늘어나고 

곳곳에서 강연 요청도 들어왔다.

그리고 오늘, TV에까지 출연하게 되었다.


"제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는 

20대 중반 어느 날이었어요."

M은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오묘한 불안감과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밤안개처럼 가득한 연말, 그날은

학교 도서관에서 취업 스터디를 마치고 

밤늦게 귀가했다. 

아르바이트로 마련한 중고 경차는 오늘도

자기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집이 얼마 남지 않은 대로변 사거리, 

M은 좌회전 신호를 기다렸다. 

곧 초록 화살표가 켜지고 

반쯤 차를 돌렸을까. 

맞은편에서 신호를 무시하고 

과속하던 자동차가

그대로 M의 차량을 들이받았다.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나중에 면허 취소 수준의 

음주 운전으로 밝혀졌다. 

M의 살뜰한 자가용은 반파되었다. 

담당의는 살아난 것도 기적이라고 했다.

M은 한동안 혼수상태에 있었는데

그동안 특별한 경험을 했다. 

10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할아버지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 손주 건강하게 잘 커줘서 고맙다고,

살다가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말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눈물이 났던 것 같아. 

그리고 할아버지와 함께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운 풍경과 빛나는 경치,

꼭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두루 마주했다. 

병원에서 M의 심장이 멈춰

20분 정도 심폐소생술을 했다고 

들은 건 나중이었다. 

일종의 임사 체험이었을까. 

일주일 가까운 시기를 보낸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고를 당하고 

응급실로 와서 꼬박 하루를 보냈었다.


"요즘 '갓생'과 '걍생'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고 해요.

 갓생(God+生)은 열심히, 

 부지런히 사는 삶이고

 걍생(그냥+生)은 대충, 

 되는대로 사는 삶이라네요. 

 그전까지는 걍생에 가깝게 살았는데

 이 일이 있고 나서 갓생으로 

 나아간 것 같아요."

그래, 지금껏 잊고 있던 그날이 

다시 떠올랐다. 

사회인으로 살면서 놓치고 있던 것,

주어진 삶을 소중히 살아야지. 

오늘이라는 하루도

다시는 오지 않을 선물 같은 거야. 

M은 카메라 너머 어딘가에서

할아버지가 지켜보시며

웃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할아버지, 앞으로도 열심히 살게요. 

감사해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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