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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영 Aug 31. 2021

아들 딸 상관없이

두 번째 시, 카멜레온 트리처럼



  엄마의 뇌출혈 수술 후 2주 동안, 타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나 대신 (여자)동생이 간병을 도맡았다. 나 역시 쉬는 날의 여유를 반납하고, 그것도 모자라 동생이 학교 가는 날은 연차를 쓰고 평일에도 내려와 엄마를 옆에서 돌보고 있다.


 엄마가 쓰러진 다음날, 큰외삼촌과 외숙모가 걱정되는 마음으로 한걸음에 달려와 따뜻한 말과 든든한 현금으로 우리를 챙겨주셨다. 큰외삼촌은 여전히 거의 매일 우리에게 전화를 거셔 엄마의 상태를 물으신다. 작은외삼촌은 소식을 늦게 아셨는데, 소식을 처음 들은 날만 전화를 세 통 하셨다. 떨리는 목소리로 우시며, 자신도 몸이 안 좋은데 40년 만에 찾은 여동생이 그렇게 되었다고 하니 마음이 너무 좋지 않다 말씀하셨다. 우리 조카 공주들 보러 월요일에 삼촌이 꼭 내려갈게~! 하시더니, 월요일에 오셔 병원 앞 던킨을 털어오셨다. 우리가 삼시 세 끼처럼 먹어도 해결될 것 같지 않은 양에, 감사한 의료진분들께 덕분에 나눠드렸다.


 서윗-한 외삼촌들을 보면서, "오빠가 있는 기분은 저런 걸까?" 동생과 이야기했다. 우리는 오빠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까? 좋았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지금 우리 둘로 충분하다. 나는 요즘 동생에게 엄청난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끼며, 간병에 대한 힘겨움을 최대한 나눠 가지려고 먼 거리를 일주일에 몇 번씩 오가고 있다. 어제도 밤 열 시 반에 퇴근해서 세 시간만 자고 막히는 출근시간을 뚫고 운전해서 내려왔다. 동생도 그에 대해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딱히 누구를 원망하지도, 누군가 부족하지도 않다고 느낀다. (물론 엄마의 남편인 아빠가 지금 옆에 있었으면 더욱 좋았겠다는 생각은 한다.)

 

 큰외삼촌이 처음 오셨던 , "아유 이런  아들이 있어야 되는데,  둘이 얼마나 걱정이 많니." 말씀하셨다. 옆에 나란히 서있던 외숙모는 외삼촌 팔뚝을 철썩 때리며 "요즘 같은 시대에 그게 무슨 말이야.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어." 하셨다. 큰외삼촌도 딸만 둘이다. 기분 상하게 하려는 의도는 0.001% 없다는 것을 안다. 그저 걱정되셔서 하는 소리라는 것도 이해한다. 우리도 아빠 없이(타국에서 자가격리 중임) 둘이  모든 상황을 헤쳐나갈  있을까 눈앞이 깜깜했을 때였으니까.


 엄마를 우리 자매가 교대로 간병한 지 2주가 지났다. 6인실 병실은 순환한다. 새로운 환자와 보호자가 들어오고, 기존에 있던 환자와 보호자가 또 나간다. 오늘 한 분이 추가로 들어오셨지만, 이전까지는 다 빠져, 엄마와 간병인을 고용하는 할머니 한 분만 계셨다. 오늘은 동생과 교대로 내가 또 들어오니, 아드님이 와계셨다. 할머님이 날 보시더니, "저기는 딸들이 얼마나 애틋하게 간호하는지 몰라." 말씀하셨다. 간병인분, 아드님, 할머님 셋이서 "역시 이런 때는 딸이 있어야 한다, 딸은 확실히 틀리다…"며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화장실을 오갈 때 어쩔 수 없는 각도에 할머님께 시선이 닿으면, 항상 할머님의 시선도 나에게 머물러 있었다. 할머님께서는 엄마와 우리가 쫑알쫑알 이야기하며 간간이 내는 웃음소리가 많이 부러우셨던 모양이다.


 "이럴 땐 남자(아들)가 있어야 해, 이럴 땐 딸이 있어야 해~" 딱히 상관은 없는 것 같다. 그저 엄마랑 더 웃고 싶어서, 엄마의 언어가 더 빨리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아기한테 부모가 말 걸듯이, 엄마가 예전의 우리에게 했듯이 똑같이, 더 말을 건네려 애쓰는 것이다. 할머님 얘기를 듣고 "우리가 아들이었으면 이렇게 엄마 옆에 안 붙어있었을까?" 물었더니 동생은 이렇게 답했다. "엄마가 쓰러지셨는데, 아들이었어도 똑같겠지."


 아들이면 부담해야 하는 책임감, 딸이면 부담해야 하는 책임감, 어르신들께서는 책임감의 종류를 성별에 따라 몫을 나누며 간혹 이야기하신다. 내가 어떤 성별이라는 이유로 특정한 책임감을 짊어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반대로 내가 어떤 성별이라는 이유로 책임감을 회피하는 것도 비겁하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누군가와 함께 애써야 한다면, 그들 서로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을 놓인 상황과 능력에 따라 지혜롭게 분배하면 도맡으면 되겠지.


 오늘 몰래 훔쳐본 엄마의 시는, 카멜레온 트리처럼 이다. 시를 쓴 날짜는 2018년 12월 14일 크리스마스 부근. 정리한 엄마의 시들을 묶어, 다음 달 오는 엄마 생신 때 책으로 내어 드리고 싶다.


 할머님의 간병인께서 6인실의 모든 불을 끄셨다. 나의 노트북 타자소리, 마우스 클릭소리가 조심스러워지며 속도가 늦춰진다. 오늘은 이만쓰고 부족한 잠을 보충해야지.





카멜레온 트리처럼



올해도 어김없이 역 광장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졌다

형형색색의 옷을 찰나에 갈아입고

지나는 이의 마음에 현란한 감정을

빛의 속도로 물들인다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트리의 몸처럼

감정의 파장도 단순, 명료하지 않다

이맘때면


시간이 흘러 연말에 다다랐고

정박한 마음은 고요히 흔들린다

실속 없이 나이테는 커져만 가고

영양불량 상태로 몸짓만 비대한 것 같다


하지만

가만가만 살펴보면 좋은 일, 기쁜 일도 있더라

어쩌다 감정은 슬픔, 불행을 향해 조준되는 것인지


너(행복)를 향해 길고 멀리 가리라

빛의 속도로


슬프고 안 좋은 감정의 옷은 빨리 갈아 입자

트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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