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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다움 Oct 20. 2024

이때 이후로는 예상소요 시간을 반드시 따져본다

여행에서의 단짠단짠, 휴식의 중요성

   

  음식에만 단짠단짠이 필요한 게 아니다. 여행에도 적용된다. 짠내 나는 장시간 땡볕 트레킹이 있다면, 달콤한 휴식으로 온천과 수영이 있었다. 각기 다른 매력의 캐넌을 느끼러 부지런히 두 발로 돌아다녔더니 다리에 피로가 급속도로 덕지덕지 붙었다. 때마침 다음 코스로 등장한 온천, 얼마나 반갑던지. 원래도 한여름에 솜이불을 덮고, 이 정도면 화상 입겠는데? 하는 물 온도를 애정하는 냉혈인(?)으로서 온천은 언제나 사랑이었다. 이름부터 '라바 핫스프링스'라니, 첫사랑 만나러 가는 소녀처럼 설레었다.

  라바 핫스프링스는 온천도 유명하지만, 동시에 튜빙으로도 이름을 알린 곳이다. 아이들은 커다란 튜브를 타고 강을 타고 내려갈 것을 상상하며 타기도 전에 환호성을 질렀다. 나보다 큰 튜브를 낑낑대며 트럭에 싣고 차로 3분 정도 가면 경사도가 제법 있는 강에 도착한다. 폭이 넓진 않았지만 강의 고저차로 물살의 속도가 상당했고, 바위나 나무 등에 의해 물의 흐름이 바뀌기 쉬운 곳이었다. 튜브가 아래로 끌어내려지며 갑자기 떨어지기도 했고, 물살이 솟아오르면 붕 떠오르기도 해서 물 위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 5분가량 튜브를 타고 내려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튜브를 차에 싣고 튜빙 할 강의 상단으로 향한다.

  튜빙을 하다가 강의 일부 구간에서 손에 맥주를 들고 강에 몸을 담근 채 여유로운 표정으로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생선구이 냄새를 맡은 고양이 마냥 홀린 듯 튜브에서 내려 그곳으로 가보고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마냥 소리를 질렀다. 분명 차가운 강물인데 어디선가 매우 뜨거운 물이 솟아올라 따뜻해지고 있었다. 지열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라 강 일부구간에서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고 한다. 차가운 강 속에서 따뜻한 물줄기가 퐁퐁퐁 올라오는데 마술처럼 신기했다.

  튜빙을 할 때는 몰랐는데 마치고 내려와서 차에 튜브를 싣는 과정에서 몸이 젖은 채로 움직이다 보니 온몸이 덜덜 떨리며 추위가 찾아왔다. 나는 이 정도 경험이면 충분하다 생각했지만, 아이들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다부진 눈빛으로 망설임 없이 튜브에 몸을 싣는데 말릴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찾은 따뜻한 물줄기는 하늘에서 날 구해주러 내려준 튼튼한 동아줄 같았다. 맘 같아선 여기서 남은 일정을 소화하고 싶었으나, 아이들의 성화에 (하늘이 내게 내려준 황금 동아줄을 버리고) 튜빙을 질릴 때까지 하고서야 숙소로 갈 수 있었다.  추워서 점점 쪼그라들던 내 몸을 펴줬던, 고마운 따뜻한 물줄기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사실 '튜빙'하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굳이'라는 단어 자동반사처럼 튀어 올라왔다. 특히 평소보다 많이 걸어서 지친 장딴지가 더 이상은 안돼,라고 보이콧하는 듯했다. 분란을 일으키기 싫은 마음이 내 신체를 누르고 튜빙에 참여했고, 덕분에 생전 처음 '따뜻한 강물'에 몸을 담그는 진기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앞전에 피곤함과 추위가 있었기에 더 따스했고 환상적인 체험으로 남았다.

  온천의 매력을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서 그다음 날 오전은 아예 온천물에 몸을 담그러 갔다. 아이들의 볼멘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천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놀만한 시설은 전혀 없는, 순수하게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러 가는 곳이었지만, 아이들끼리 새로운 놀이(돌멩이 모으기 놀이, 뜨거운 물에서 누가 오래 버티나 놀이 등)를 발견하고 잘 노는 모습에 흐뭇했다. 덕분에 여행의 단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지나고 보니, 이 따뜻한 경험은 그다음에 올 여행의 짠맛을 대비하는 것이었나 보다. 오전에 온천으로 말랑해진 근육은 다시 그날 오후 호수를 따라 트레킹을 3시간 이상하면서 더 단단해졌다. 짠맛을 안겨줬던 다음 여정 지는 그랜드 티턴(Grand teton)이었다. 다른 여행지에 비해 생소했지만, 미국에서 방문율이 높은 국립공원 10위안에 드는 인기 있는 여행지라고 한다. 높은 산봉우리에 만년설이 설핏 보여 장엄한 분위기를 풍기고, 빙하가 녹아든 파란 호수들이 편안함을 주는 곳이다.

   그랜드 티턴에서 제일 인기 있는 'Jenny Lake Loop Trail'에 도전했다. 제니 레이크를 가로지르는 유람선을 타고 내린 다음부터 걷기 시작했다. 많은 트레일을 섭렵한 끝에 제법 붙은 다리 근육을 믿고, 예상소요 시간 약 2시간을 목표로 트레킹을 시작했다. 곰이 출몰할 수도 있다는 표지판 등장에 살짝 긴장감을 갖고, 호수가를 따라 만들어진 트레일을 따라 여느 때처럼 걷었다. 그런데 한참을 가도 도착점이 요원했고, 늦은 오후에 출발한 트레킹은 이른 밤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이들의 고정 질문 "얼마나 더 가야 해?"의 빈도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도로가 보이는 곳까지 도착하자 남편이 '고생 한 사람에게 몰아주기'를 제안했다. 남편 혼자 재빨리 걸어서 차를 가지고 오고, 나와 아이들은 그곳에서 쉬며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의리상 같이 가자고 한 번은 말했으나 내 팔다리에 엉겨 붙은 두 아들을 보고, 얼른 다녀오면 감사하겠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냈다. 결국 그날의 트레킹은 남편의 희생으로 1시간은 단축하여 2시간 반으로 마무리 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호수의 트레일을 걷는데, 해는 저물어가고 야생곰이 출몰할 위험이 있는 곳이었기에 장르가 자연다큐에서 호러스릴로 바뀔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 눈부신 자연경치에 릴렉스 했다가도, 곰 출몰 위험을 알리는 표지판에는 바짝 긴장했다 ]

  무사히 트레킹을 마친 덕분에 이번에도 교훈을 얻었다. 아이와 트레킹을 할 때는 시간계산을 더 여유 있게 해야겠다고, 아이들의 체력감소에 따른 시간 지연도 감안해야겠다고, 그리고 특히 해 질 무렵에는 가급적 긴 트레킹 지양하기로 다짐했다. 결국 그날은 저녁 8시가 훌쩍 넘어 캠핑장에 돌아왔고, 어스름한 달빛과 조그만 손전등에 의지하여 깜깜한 어둠 속에서 끓인 라면으로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


  짠맛의 스펙터클한 트레킹을 했으니, 이번엔 다시 단맛을 찾을 차례였다. 캠핑장에서 가까운 호숫가에 서 그저 아무 목적 없이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아이들은 여기에서도 돌멩이로 성도 만들고, 튜브를 타며 선장 역할놀이를 하였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호수와 아이들에 눈의 초점을 맞추고 머리는 멍 때리기를 시전 했다. 어제는 가까이서 치열하게 보았던 산봉우리를  멀리 떨어져서,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서 호수와 한눈에 담는데 참으로 평화로웠다.

[튜브에 몸을 싣고 호수 중앙으로 가는 아들(어머님 아들 포함)을 보며,  너무 멀리 가면 어쩌지?하는 상상을 했다. 그 후에 찾아온 은은한 미소의 이유는 밝히지 않겠다. 하하 ]

  차가운 물에서 튜빙 후 만난 온천, 밀도 높은 트레킹 한 다음날 앉아서 본 호수가의 풍경. 모두 앞에 있던 '짠맛'으로 인해 뒤에 만난 '단맛'을 더 제대로 음미할 수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어느새 '쾌락의 쳇바퀴'에 빠져있었다. 즉 특별함으로 가득한 여행을 매일 하다 보니 매우 행복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상황에 익숙해진 탓에 처음만큼의 행복을 못 느꼈다. 꿈에 그리던 미국 서부 여행이었는지라 창밖에 지나치는 풍경 하나에도 감탄사를 연발하곤 했는데, 점점 눈앞의 진풍경을 보아도 시큰둥하고 행복함의 농도가 옅어지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찾아온 '짠맛의 경험'들은 나를 초심으로 돌려놓았고, 그 후에 찾아온 '닷맛의 경험'으로 인해 다시 우윳빛 뽀얀 렌즈를 장착하고 여행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어쩌면 내가 지금 '만족과 행복'이라 여기는 이 순간은 앞서 지나간 '고통과 불행'이 깔아준 덕분에 더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봤다. (물론 만족감을 처음처럼 못 느낀다 할지라도, 그냥 매일이 달콤한 일들로만 가득 찼으면 좋겠지만. 하하하)


덧. 이때까지만 해도 맑은 대기의 중요성을 몰랐다. 미국에서는 미세먼지 없는 청명한 하늘이 기본값이었기 때문이었다. 뿌연 하늘을 보면, 잠시 날씨가 좀 흐린가?하고 넘겼다. 해질녁 노을을 보면서도 무심히 그랬다, 안개가 낀건가. 예상치 못한 악재로 우리 여행에 안개가 끼고 있을 이때는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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