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다움 Oct 19. 2024

다 각기 다른 이유로 좋아

자이언(물장구치며 하는 트레킹) VS브라이슨(다채로운 색상의 암석기둥)

   

  

  미국여행은 역시 자연이었다. 자이언 국립공원(Zion National Park)에 오자마자 싱그러운 풀내음이 가득한 숲의 향기에 긴장으로 한껏 솟은 승모근이 제자리를 찾았다. 라스베가스라는 잠깐의 일탈을 마치고, 미국 서부의 주요 국립공원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관광 루트인 '그랜드 서클(Grand Circle)'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자이언 국립공원 역시 장엄한 협곡과 다양한 트레일이 유명했는데, 그중에도 '물 위를 걷는 트레킹'이라 불리는 "The Narrows Trail"이 백미라 하여 도전하기로 했다. 또한 어렵게 예약한 숙소인 자이언 국립공원의 랏지도 기대가 컸다.

[ 간만에 나에게 온전한 자유시간을 선물해주신 파크 레인저에게 감사 ]

  이곳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 이상이었다. 자이언 국립공원은 어린아이와 같이 오기 특히 좋았다. 비지터 센터에서 할 수 있는 주니어 레인저는 물론, 네이처 센터가 따로 있어서 여기에 서식하는 동물, 식물 등 자연환경에 대해 담당자(파크 레인저)가 상세히 설명해 주는 귀한 시간도 있었다. 미국 여행이지만, 한국어만 사랑하는 부모로 인해 아이들이 영어에 노출될 일이 거의 없었는데, 오래간만에 영어로 강의도 듣고 질문도 하는 아이들을 보니 뿌듯했다.(간만에 어른에게 온전한 자유시간이 왔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썼습니다. 하하하)

    

  오전 10시에 숙소를 출발한 우리는 'Riverside Walk Trail'을 거쳐 우리의 목적지였던 'The Narrows Trail'에 들어섰다. 물에 젖으면 버려도 되는 낡은 운동화를 신고, 두 손에는 하이킹 우드스틱을 들고 앞으로 전진했다. 한여름인데도 불구하고 발이 물에 닿을 때면 어금니를 꽉 깨물정도로 차가웠다. 이런 나와는 달리 두 아이들은 신나서 물을 첨벙거리면서 거침없이 앞으로 나갔다. 처음엔 발목 깊이였던 물이 점점 앞으로 갈수록 종아리, 배꼽을 넘어 가슴 높이까지 왔다. 추위에 취약한 첫째 아들과 나는 이빨을 덜덜 부딪히며 더 이상 못 가겠다고 선포했고, 남편과 둘째 아들은 좀 더 가기로 했다. 둘째는 가겠다고는 했지만 본인 키를 넘는 물의 깊이에 남편은 할 수 없이 아들을 둘러업고 저벅저벅 걸었다. 한 낮인데도 물이 꽤 차가웠고 바닥에 둥근돌로 인해 미끄러워 가기 쉽지 않았기에, 남편의 뒷모습이 애잔하기도 했다. 선반에서 물건 내릴 때 빼고 발휘될 일 없던 남편의 큰 키라는 장점이 이럴 때 빛을 발해 뿌듯했다. (둘째 아들이 혹시 나도 같이 가자고 할까 봐 잠시 바라보고는 냉큼 고개를 돌려서 하염없이 바닥만 바라보았다. 하하하)

  돌아오는 길에는 다 젖은 운동화는 벗고 준비해 간 크록스를 신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보통은 여름에 미국 서부 여행 시 트레킹은 오전에 마쳐야지 오후까지 이어지면 작열하는 태양 때문에 한발 걷고 한숨 쉬기를 반복한다. 그런데 이번 자이언은 협곡의 차가운 물을 적시며 하는 트레일이다 보니 오히려 늦게 출발한 트레킹이 신의 한 수였다. 돌아오는 길에 12시의 해가 등 뒤를 내리쬐어 서서히 젖은 옷이 말라가는 느낌도 좋았다. 아이들이 늦장 피우다가 늦어진 트레킹이었지만, 오히려 결론적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가장 많이 느끼는 점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아무리 계획을 세세히 짜보고, 준비물을 챙겨봐도 현장에 도착하면 변수들이 급습한다. 그럴 때 당황하고 짜증 낼 수도 있지만, 이미 벌어진 상황은 좋은 점을 (굳이 굳이) 찾는 것도 여행의 만족도를 높이는 길 중 하나였다. 그렇게 대문자 J로 계획대로 안되었을 때 급발진하던 나는 여행에서 여유와 융통성을 배운다. 물론, 이 날 늦어진 트래킹으로 인해 후에 예정된 일정에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밥은 후다닥 먹어야 하긴 했지만... (덕분에 남편은 맥주 한잔의 여유는 날아갔다. 이것도 아이들 덕분에 맥주값 아낀 거라고 생각했다. 앗, 러키비키잖아! 하하하)  

  

[ 발목에 찰랑거리던 물은 앞으로 나갈수록 깊어졌다. 키가 작은 나는 끝까지 가겠다는 아이의 선택을 받지 않았다. 하하]

  

  물을 가르며 나아갔던 자이언 캐넌 트레킹을 무사히 마치고, 그다음 여정은 또 다른 그랜드 서클인 '브라이슨 캐넌'이었다. 그랜드 캐넌, 자이언 캐넌, 브라이슨  캐넌. 모두 '캐넌'이지만, 브라이슨 캐넌은 엄밀히 말하면 '캐넌(강에 의해 침식되어 형성된 깊고 좁은 협곡)'은 아니란다. 브라이슨 캐넌은 '후두(Hoodoo)'라 불리는 기암괴석들이 형성된 곳으로 고원의 침식 작용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은 기존의 캐넌들과 달리 멀리서 보면 기다란 연필을 깎아서 꽂아놓은 듯한 독특함이 눈을 사로잡았다. 또한 다른 곳과 달리 '다양한 색상(주황색, 분홍색, 흰색 등)'이 있다는 점 역시 매력적이었다. 이런 사실은 아이들과 주니어 레인저 배지를 받기 위해 풀어야 하는 문제를 풀다 보니 알게 되었다. 주니어 레인저는 원래 아이들의 과제이지만, 한국어로도 어려운 단어들이 대거 등장하는 바람에 시니어인 나의 지분이 80%를 넘는다. 막상 주니어 레인저를 내가 풀고 있을 때는 현타가 왔지만, 덕분에 지형을 잘 이해한 만큼 더 잘 보였던 것은 장점이었다.(시니어인 내가 주니어 레인저를 함께 해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가며, 스스로를 설득하는 말이었습니다. 하하하)

 브라이슨 캐넌에서는 도착하자마자 저녁에 'Navajo Loop Trail(Sunset Point)'을, 다음날 오전에는 'Queens Garden Trail(Sunrise Point)'을 걸었다.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른 기암괴석들에는 이름(Wall street 등)이 붙여진 곳도 있었는데, 어떤 부분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을까를 생각하며 사진을 찍는 것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놀이가 안 통할 때가 있었으니, 그것은 해가 쨍쨍한 한낮에 하는 트래킹이었다. 오전 10시쯤 시작한 트래킹이 12시쯤 돼서 끝이 났는데, 아이들은 덥고 힘들어서 더 이상은 못 가겠다며 한발 내딛을 때마다 극대노를 시전 하곤 했다. 그럴 때 제일 주요하게 작용했던 말은  좀 더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자'였다. 엄청난 비용과 시간을 들여 평생 한번 오기 힘든 이곳까지 왔건만, 아무리 좋은 풍경도 더위 앞에선 소용이 없었다. 동네에서 흔히 사 먹는 아이스크림으로 몸속에 녹아든 한낮의 열기를 누른 후에야 미소를 찾은 아이들이었다. 아이들과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 만큼 중요한 게 '언제 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여름에 하이킹은 무조건 해가 없을 때 가야 한다는 진리를 얻고 돌아왔다.

   '캐넌' 돌림자(?)를 쓰는 곳 중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곳은 '브라이슨 캐넌'이었다. 그랜드 캐넌이 규모에서 압도적이고, 자이언 캐넌은 물속의 트레킹이라는 특이한 경험이 있었다면, 브라이슨 캐넌은 모양과 색상이 다채로워 매력적이었다. 붉은빛 암석에  분홍색, 하얀색 등 다양한 색이 섞인 게 눈길을 끌었는데, 이는 암석들이 서로 다른 미네랄로 구성되어 산화 과정에서 각각 색이 달라지기 때문이란다. 그런 면에서 우리 가족은 브라이슨 캐넌과 닮았다. 다양한 암석들이 있었기에 다채로운 색상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 가족의 여행도 다양한 캐릭터가 모여있어서 변화무쌍한 여행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손잡고 트래킹을 하다가 내가 넘어질 뻔 하자 재빨리 손을 놓으며 두 명이 다치느니 한 명만 다치는 게 낫지 않냐는 논리적인 첫째 아들지만, 힘들 땐 본인에게 기대도 된다고 다정하게 말할 줄도 안다. 배고프고 힘들면 말보다는 짜증과 울음, 종종 드러눕기까지 시전 하는 둘째 아들이지만 동시에 엄마가 더울까 봐 본인의 손선풍기를 기꺼이 엄마 목에 걸어주기도 한다. 사진을 찍을 때 내 이목구비의 돋보임보다는 아름다운 자연 배경을 중시하는 남편이지만, 가족을 위해 8시간 운전도 묵묵하게 해낸다.

  각자 개성 넘치는 캐릭터를 지닌 개인이지만, 24시간 동고동락하는 여행으로 풍화와 침식작용을 거쳐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는 느낌이었다. 브라이슨 캐넌에서 무수히 많은 암석기둥을 봤지만 똑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기에 더 인상적인 것처럼, 우리 가족도 얼핏 보면 닮았지만 알고 보면 다른 캐릭터가 모였기에 더 아름다운 게 아닐까. 그렇게 다채로운 색이 섞인 붉은 암석기둥이 인상적이었던 브라이슨 캐넌에서 개성 강한 우리 가족을 떠올렸다. 좀 더 시간이 흘러, 지금보다 더 조화로운 우리가 되길 바라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