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초의 국립공원, 엘로스톤의 매력
미국 서부여행을 먼저 다녀온 지인들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엘로스톤'이라고 말한다. 엘로스톤은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이며, 그랜드 캐넌 다음으로 미국에서 큰 국립공원이다. 미국에 오기 전까지는 못 들었던 이름이지만, 미국에 온 후 지인들의 여행후기담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곳이기에 기대가 컸다.
사람들이 최고로 꼽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 기준에 한마디로 요약하면 '종합선물세트'같은 곳이었다. 엘로스톤에서 주요 관광지를 크게 네 가지 구역으로 볼 수 있다. 서남쪽에 올드 페이스풀(Old Faithful Area), 웨스트 썸(West Thumb), 북쪽에는 그랜드 플라즈마 스프링(Grand Prismatic Spring)으로 유명한 노리스(Norris Geyser Basin), 북동쪽으로 맘모스 핫 스프링스(Mammoth Hot Springs), 동부에 캐년 빌리지(Canyon Village)로 나눌 수 있다. 이름에서도 드러나 듯 가이저, 캐넌, 핫스프링 등 다양한 것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엘로스톤이 다른 국립공원과 가장 큰 차이점이라 하면 '가이저(Geyser)'이다. 지열활동에 의해 물과 수증기를 주기적으로 분출하는 자연현상인데, 엘로스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가이저(약 500여 개)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올드 페이스풀 가이저(Old Faithful Geyser)의 경우 예상분출시간을 비지터 센터에서 확인할 수 있어서 관찰이 쉬웠다. 감상평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연이 선물하는 분수쇼 같다. 땅에서 하늘로 높게 치솟는 물과 수증기를 보고 있으면, '펑, 펑'이라는 의성어를 자연스레 붙이게 된다. 이처럼 규모가 크고 시간이 예측가능한 가이저 외에도, 엘로스톤의 서남쪽에 있는 트레일을 걷다 보면 수많은 가이저를 볼 수 있다. 지나가다가 갑자기 피슝 하며 솟구치는 하얀 수증기와 물줄기를 보면 또 한동안 넋 놓고 보기를 반복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기대했던 가이저를 본 아이들의 반응이자 초반 10분 모습이고, 나머지는 엘로스톤의 토양연구가(땅파기와 돌수집) 혹은 단거리 육상선수(맥락 없이 냅다 뛰어다니기)에 주력했다. 게다가 지열 활동에 의해 발생하는 황화수소 등으로 인해 발생한 독특한 냄새를 두고, 계란 썩은 냄새라면서 야유를 보내기까지 했다. 특히 '머드 볼케이노(Mud volcano)' 지역을 지날 때는 색상마저 거무튀튀한 진흙이 보글보글 끓면서 냄새가 나자, 아이들의 웃음버튼인 단어 '똥'을 들먹이며 박장대소를 하면서도 동시에 신속하게 빠져나가길 강요했다.
살면서 쉽게 보기 힘든 자연현상인 가이저를 보고 자연스럽게 과학수업을 해보려는 엄마의 계획은 산산이 무너졌다. 아이들을 위해 왔는데 이대로 돌아갈 순 없었다. 교육적인 것을 찾다가 엘로스톤의 필살기인 '야생동물'을 공략하기에 이른다. 야생동물을 많이 보기로 유명한 곳인 헤이든 밸리(Hayden Valley)와 라마 밸리(Lamar Valley)를 찾아갔다. 특히 라마 밸리는 미국의 세렝게티라 불리며 다양한 야생동물의 서식지로, 바이슨, 곰, 늑대 등이 출몰하기로 유명했다.
첫날엔 동선 상 있던 헤이든 벨리를 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아무리 차를 내달려도 뻥 뚫린 도로만 있을 뿐, 눈을 크게 뜨고 찾아도 공원에 강아지만큼이나 흔하다는 바이슨조차 볼 수가 없었다. 아이들의 재촉에 애간장이 달고, 조급증이 찾아올 무렵, 하느님이 보우하사 볶이는 엄마를 위한 신의 선물이 왔다. 믿기 어렵게도 잠깐 들른 화장실 뒤에서 바이슨이 쓰윽 나타나 주차장에 고인 물을 마시며 잠깐 사진 찍을 시간마저 주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우연히 마주한 바이슨을 시작으로 그다음 날 간 라마 밸리에서는 바이슨은 질리도록 보고, 늑대도 한 마리 보았지만 이번엔 그토록 보고 싶은 '곰'은 보지 못하여 아이들은 또 실망하기에 이른다. 사실 바이슨, 곰은 실제 마주하면 굉장히 위험하여, 바이슨은 최소 30미터 (약 2.5대의 버스), 곰은 최소 100미터 (약 8.3대의 버스)를 두고 관찰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위험한 동물이지만 차 안에서 보는 건 상대적으로 안전하기에 라마밸리를 드라이브하면서 곰을 찾아 헤맸지만 결국 곰은 보지 못했다.
곰이 나타나지 않아서 시무룩한 아이들의 기분전환을 위해 이번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로 해봤다. 엘로스톤 하면 대표적인 사진으로 나오는 다양한 색상이 특징인 온천(Spring)- '모닝글로리(Morning Glory Pool)', 그랜드 플라스마 스프링 (Grand Prismatic Spring)-에 가기로 했다. 사진을 보여주자, 학교에서 이 사진을 배운 적이 있다며 그래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부싯돌에서 튀는 작은 불꽃을 놓치지 않듯, 아이들의 흥미가 사라지기 전에 트레킹을 시작했다. 이 두 곳의 공통점이라면 중심부는 파란색이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노란색, 주황색, 녹색 등 다양한 색이 있는 게 특징이다. 인위적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선명하고 다양한 색이 한 곳에 모여있는 게 신기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모닝 글로리는 약 20m 직경으로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아 한눈에 들어오는 둥근 모양이라면, 그랜드 플라즈마 스프링은 직경이 약 90m에 달하기에 전체적인 모습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높은 곳(Grand Prismatic Overlook)에 올라가야 한다.
이것이 또 일반적인 설명이라면, 아이들과 함께 본 이 두 곳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모닝글로리는 평지 트레일(Upper Geyser Basin 지역의 Fairy Falls Trail)을 1시간 정도 걸어야 나타나는 곳에 있기에 가는 내내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물어보면 짧게 답하고, 가는 곳곳에 있는 다른 가이저들를 가리키며 주위를 분산시켰다. 반면 그랜드 플라즈마 스프링은 근처를 한 바퀴 뺑 돌 수도 있지만, 한눈에 다 보기 위해서는 전망대인 오버룩으로 가야 하는데 여기가 오르막길이라서 30분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경사가 꽤 있고 다른 볼거리는 없어서, 더 이상은 못 가겠다를 반복하는 아이들을 달래는 게 핵심이다. (아이들에게 둘 다 큰 감흥이 없다는 것은 공통점이었다. 하하하)
아이들이 걷는 게 힘들다고 보이콧을 하기 시작하면, 드라이브를 시작한다. 이번엔 캐넌 빌리지를 갔는데 폭포 등의 경치를 감상하는데 차에서 내려서 많이 걷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특히 이름(Grand Canyon of the Yellowstone)부터 그랜드 캐넌을 연상케 해서 친숙한 아름다운 협곡이었다. 하지만 그랜든 캐넌을 다녀온 후에 엘로스톤을 가서일까. 이름 때문에 그랜드 캐넌의 '아류작'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분명 각기 다른 매력이 있었지만, 그랜드 캐넌에서 실컷 캐넌을 보고 와서 그런지 엘로스톤에서 다시 만난 캐넌은 김 빠진 소다 같은 느낌이었다. 아마 엘로스톤을 먼저 보고, 그랜드 캐넌을 봤다면 맛보기 후 본품 시식 같은 느낌이라서 둘 다 좋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봤다. 어딜 보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순서로 가는지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엘로스톤에서 갔던 곳은 맘모스 핫스프링 지역으로 계단식 석회암 테라스가 특징인 곳이었다. 사진으로 봤을 땐 흰 눈이 쌓인 줄 알았는데, 온천수에 녹아 있는 칼슘이 흘러내려 흰색 석회암 구조물이 되었다고 한다. 흰색뿐만 아니라 주황색, 갈색 등 다양한 색깔도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형태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신기해서 한참을 쳐다보고 있는데, 애들은 내 옷가지를 잡아당기며 묻는다. 이게 끝이야? 이젠 더 이상 아이들의 흥밋거리를 찾기를 포기하고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거기서 뜻밖의 구세주를 만났다. 평범한 미국식 햄버거 등을 파는 곳이었는데 키즈메뉴는 스쿨버스 모양의 종이에 담아주었다. 그제야 아이들은 이거지! 하면서 환호성을 지른다. (후에 엘로스톤에서 어디가 제일 좋았냐는 질문에 이 식당이 최고로 좋다고 답했고, 이유는 묻지 않았다. 하하하)
나에게 어디가 제일 좋았냐고 묻는다면 단연 가이저(Geyser)와 핫스프링(Hot spring)이다. 쉽게 볼 수 없는 자연현상이기에 신기했고, 또 모닝글로리나 그랜드 플라즈마 같은 다양한 색이 펼쳐진 풍경은 예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한 번에 다양한 것을 접할 수 있던, 종합선물세트 같던 엘로스톤이었다. 만약 미국의 국립공원 중 하나만 딱 골라서 가야 한다면 나도 엘로스톤을 추천해주고 싶다. 그랜드 캐년에서 볼 수 있었던 거대한 자연도 만날 수 있었고, 야생동물을 화장실 갔다가 나오면서도 만날 수도 있고, 가이저와 총천연색의 핫스프링이라는 독특함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아이들에게도 종합선물세트 같긴 했는데, 뉘앙스는 좀 다르다. 중복된 아이템들의 반복으로도 볼 수 있어서 한 가지 매력을 딱 집어내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다. 가이저와 핫스프링이 신기하긴 한데 아이들에겐 그저 달걀 냄새나는 분수에 불과했고, 계속 가이저와 핫스프링, 야생동물을 보다 보니 그마저도 질렸는지 표정에 생기가 사라졌다. 다른 곳으로 이동이 필요했다. 아이와의 여행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흥미롭기도 하고 맥이 빠지기도 한다. 그렇게 이번여행을 하이라이트였던 엘로스톤은 조금은 아쉽게 마무리했다.
아이들과 여행을 하며 삶의 단순한 진리를 몸소 깨달을 때가 있는데 엘로스톤도 그랬다. 큰 맘먹고 멀리 왔는데, 아이들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집 앞에서 하던 행동을 여기서도 한다. 즉 아이들에게 장소가 주는 의미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든 본인이 좋아하는 활동(땅파기, 달리기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의 일관성 있는 행동에 박수를 보내며, 어쩌면 아이들이 행복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타인이 세워놓은 기준에서 행복을 찾는 게 아니라, 내가 진정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찾아내고 주변 시선에 상관없이 줄기차게 할 수 있는 용기. 못마땅한 엄마의 재촉 데시벨이 올라가도 못 들은 척하고 계속하는 끈기까지.(아이들 덕분에 나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훈련을 한다. 하하) 엄마는 어떻게든 교육적인 거리를 찾아서 보여주려 애쓰지만, 사실 아이들은 관심이 없다. 그냥 본인이 보고 느끼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렇게 또 한 번 내 욕심을 내려놓고,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를 (강제로) 실천한다.
덧.
아이들은 논외로 하고, 나도 엘로스톤에서 뭔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사진을 찍은 것을 보고 원인을 찾아냈다. 캐나다 산불로 인한 연기가 엘로스톤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하루종일 연잿빛 하늘과 답답한 공기가 여행 내내 따라다녔다. 아무리 멋진의 풍경도 흐릿하게 퍼진 연기가 시야를 뿌옇게 가리면서 어두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미세먼지로 인해 익숙했었는데, 미국에 와서는 대형산불 같은 재해가 아닌 이상 쾌청한 하늘이 기본값이었는데. 아무리 좋은 배경도 그날의 하늘이 어떠냐에 따라 그 이미지가 달라지는 것을 보고 또 깨닫는다. 건강을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듯이, 맑은 하늘을 못 보니 그 존재감을 느낀다. 아름다운 엘로스톤과 파란 하늘이 어울려졌다면, 더 멋진 풍경이었을 텐데 하며 아쉬움이 남는다.
왜 하필 내가 놀러 왔을 때 캐나다에 산불이 나가지고 하늘이 흐린 거냐며 투덜거렸는데, 뿌연 하늘은 그래도 약과였다는 것을 며칠 뒤에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