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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다움 Oct 26. 2024

'캐나다 산불'은 시작에 불과했다

캐나다 벤프 : 에메랄드 빛 호수를 찾으신다면


  살다 보면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질 때가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로맨틱 코미디 같은 가벼운 장르가 아니라 재난영화 같은 묵직함이 몰려오기 쉽다. 이번 벤프 여행이 그랬다. '이왕 거기까지 간 김에'를 거듭한 끝에 마지막 여행 종착지를 캐나다 벤프로 정했다. 지인이 캐나다 벤프가 호수의 끝판왕이라는 이야기에, 만두피 귀를 펄럭이며 간 것이다. 일주일 전 엘로스톤에서 하늘이 뿌연 이유가 캐나다 산불이라는 걸 듣고도 나와 별 상관없는 이야기로 치부했다. 그런데 벤프에 도착하기 일주일 전, 함께 가려던 제스퍼 설상차 예약이 자동취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100년간 재스퍼 국립공원에서 기록된 가장 큰 산불"이라며 "진화에 최소한 3개월은 걸릴 전망이다"는 암울한 뉴스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벤프까지는 피해가 없었기에 캠핑장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재스퍼에서 계획한 하루 일정이 날아간 상황이었다. 여행 끝자락이었지만, 캐나다 여행 일정이 줄어들면 뒤에 남은 시카고 등 남은 여행에 차질이 생길 상황이었다. 고심 끝에 제스퍼에서의 계획했던 시간을 벤프에서 소화하고, 나머지 여행은 변동 없이 진행했다. 설상차 일정 취소에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캐나다 캠핑장에 도착하니 말린 어깨가 조금 펴졌다.

[어렵게 예약한 캠핑장인데 샤워장은 고장이었다. 멋진 뷰에 장작이 무한제공이었지만, 산불경계령으로 캠프파이어 금지였다. ]


  사실 캐나다 벤프 국립공원 캠핑사이트를 예약하는 건 쉽지 않았다. 시간을 맞춰서 휴대폰 3개, 데스크톱, 노트북까지 포함해서 총 5개의 기기로 접속시도 했는데 20분의 기다림 끝에 한자리 겨우 예약했다. 그마저도 제일가고 싶었던 장소예약은 실패했지만, 차순위라도 어디냐며 기쁘게 결제했던 곳이다. 벤프의 다른 숙소에 비해 국립 캠핑장은 저렴했고, 특히 여기서는 캠프파이어할 수 있는 나무를 무제한 제공한다는 특장점이 있어서 기대가 컸다.(그런데 산불주의보 발령으로 캠프파이어는 할 수 없었다. 흑)

[ 호수와 유사했던 커플티 색깔. 가족끼리 커플티가 소원이라던 아이가 귀여웠다. ] 

  짐을 캠핑장에 풀고, 곧장 벤프 다운타운으로 갔다. 한참 달달한 신혼일 때도 촌스럽다면서 커플티를 고사하던 남편이었는데, 자신의 미니미 아들과 커플티는 또 달랐나 보다. 가슴팍엔 'Banff'라고 큼지막한 글자가 쓰여있고, 색감도 벤프 호수를 닮아 쨍한 비취색이라 평소에 입기엔 다소 어려울 듯싶은데도 기꺼이 구매한 남편이었다. 의상도 구매했겠다, 본격적으로 벤프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어댔다.

  둘째 날은 벤프 타운 사인(Banff Town Sign) 앞에서 사진을 찍고 좀 더 멀리 나가봤다. 첫 방문지는 페이토 레이크(Peyto Lake Upper viewpoint)였다. 30분 정도 가볍게 오르막길을 오르니 맑은 옥색의 호수가 눈앞에 펼쳐졌다.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관광지인만큼 사람이 매우 많아 우리 가족만 인증샷을 찍는데 한참 애먹긴 했다. 다음으로는 요호 국립공원(Yoho National Park)에 있는 타카카우 폭포(Takakkaw Falls)를 향했다. 언제 물가에서 놀 수 있냐고 아침부터 물어보는 아이들에게, 폭포에서 물폭탄(?) 놀이를 할 수 있을 거라며 데려갔다. 역시 어렵지 않게 도착하는 관광지라 사람이 엄청 많고, 가까이서 사진을 찍으려니 엄청난 물방울 공격(?)에 눈을 제대로 뜨기가 힘들었다. 

  

 재빨리 인증샷을 찍고는 다음 장소인 에메랄드 호수(Emerald Lake)로 향했다. 폭포에서 물놀이를 못 한 아이들의 원성이 높아져서 에메랄드 호수에서는 물놀이 시간을 줄 수밖에 없었다. 매번 물가에 가면 돌을 쌓고 물길을 만들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는 아이들이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을 시야에 두고 에메랄드빛 호수 앞에서 한참 집 나가서 돌아오지 않던 내 정신을 불러들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호수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편해졌다. (물론 아이들이 운동화가 젖는 것은 계산에 두지 않은 채 자꾸 호수로 진격해서 말리느라 입이 바쁘긴 했다. 하하하)

[ 에메랄드 빛 호수를 흙탕물로 만드는 재주를 발휘하는 아이들. 신발이 방수가 안된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 허허허 ] 

  

 셋째 날은 벤프를 대표하는 호수인 모레인(MorainLake)과 루이스(LakeLouise)에 갔다. 이곳은 반드시 셔틀버스로 가야 하는 곳이기에 미리 예약한 시간보다 일찍 정류장에 도착했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어느새 폭우로 바뀌어 버스에 타기 전에는 이 날씨에 호수에 가는 게 맞나? 싶을 정도였다. 벤프에서 호수조차 못 가는 건가 싶어서 쫄딱 젖어버린 양말만큼 축축해진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죽상이었던 게 무색하게 셔틀버스에서 내리자 더 이상 우비가 필요 없는, 파란 하늘이 우리를 반겼다. 오히려 연기로 자욱했던 뿌연 하늘이 시원하게 내린 비로 인해 깨끗해진 후였다. 10분 정도 산책로를 올라가면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는 지점이 있는데 비 갠 후 올라오는 흙내음과 함께 바라본 호수는 참으로 좋았다. 시선을 고정한 채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데, 엄마가 다음 일정을 놓칠까 봐 산책로에 고인 물구덩이에서 찰방거리는 아드님을 발견하고는 손 꼭 잡고 다시 셔틀버스에 올랐다.

모레인 레이크 (Morain Lake)

  레이크 루이스(LakeLouise)도 마찬가지로 셔틀버스로만 갈 수 있었는데, 역시 에메랄드빛 호수가 있었다. 여기는 호수를 따라 평지를 트레킹 하던데 우리는 그냥 사진만 찍고 점심으로 싸간 식빵만 먹고 돌아왔다. 아이들은 더 이상 물놀이를 하지 못하는 호수 따윈 관심이 없었고, 남편은 자신이 좋아하는 호수의 색은 투명한 파란색이지 이렇게 속이 안 보이는 옥색호수는 감흥이 없다고 해서였다. 게다가 원래 호수에서 타려고 했던 카약을 포기해서 더 할 일이 없었다. 앞서 갔던 글레이셔 공원에서 탔던 모터보드가 1시간에 35달러였는데, 벤프에서는 수동보트가 150달러 정도 했기에 상대적으로 비싸서 타지 않은 것이다. 에메랄드 빛 호수 자체에 열광하는 나와달리 아들(어머님 아들 포함)들은 반응이 시큰둥했고, 다수결에 의해 소수 의견인 나의 취향은 접어뒀다. 

레이크 루이스(Lake Louise)

  남는 시간만큼 벤프에서도 '존스턴 캐년(Johnston Canyon)'에서 트레킹에 도전했다. 10분 정도 잘 걷고 있는 와중 둘째가 급하게 생리현상을 호소했고, 첫째는 그런 둘째를 기다리기 싫다며 짜증을 냈다. 순식간에 평화는 깨지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남편이 둘째와 화장실에 갔다 와서 밑에서 기다리고, 나와 첫째는 30분 정도 더 갔다 오기로 했다. 결국 그날 둘째의 갑작스러운 화장실 방문으로 인해  남편은 좋아하는 트레킹은 하지 못했다. 계획이란 원래 이렇게 돌발상황까지 포함해야 하나 싶은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캐나다 일정을 취소하지 않고 다 끝냈다는 것 정도였다.  

  벤프에서의 여행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전환의 연속'이었다. 캐나다 산불이 시작이었다. 이로 인해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설상차 탑승은 물 건너갔지만, 벤프의 호수를 더 오래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벤프를 즐기려 했는데 폭우가 내려 쫄딱 젖었지만, 막상 호숫가에 도착하니 비가 멈추고 뿌연 연기마 저 사라져서 호수를 감상하기에 최적이었다. 기분 좋게 호수에 가서 타고자 했던 보트가 바로 앞전에 들렀던 곳과 상대적 가격차가 크면서 포기했지만 그만큼 시간이 절약되어 트레킹에 오를 수 있었다. 트레킹을 하자마자 화장실을 찾는 둘째 덕에 남편은 좋아하는 트레킹을 할 수 없었지만... 

[ 오전 내내 줄기차게 내리던 빗줄기는 거짓말처럼 그쳤다. 비는 뿌연 하늘을 가져갔고, 우리는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 

  

  벤프에서는 '새옹지마'를 제대로 체험했다.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끊임없이 펼쳐지고, 그 안에서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계속되지 않았다. 예기치 않은 전환으로 그 결과는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런 경험이 누적될수록 감정의 양극단에서 내려와 중간지점을 찾아갔다. 너무 큰 기대도, 실망도 하지 않은 채 그 시점에 그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면서 쌓아간 하루였고, 돌아보니 후회가 적었다. 당장의 큰 기쁨 앞에서 겸손할 수 있었고, 깊은 슬픔을 헤쳐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인생은 원래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게 정상이라는 진리를 몸소 겪으며, 집에서 가장 멀리 온 여행지인 벤프를 기점으로 여행은 마무리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덧. 가성비 좋은 벤프 캠핑장에서 한 가지 큰 단점이 샤워장이 폐쇄된 것이다. 하루정도야 대충 버티지만(?), 이틀연속으로 못 씻는 건 고역이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간 곳이 근처의 온천. 벤프의 멋진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하는 야외 온천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렇게 1시간 정도 지났을 때였다. 갑자기 천둥번개가 한번 치자 안전요원의 안내로 온천장이 마감되었다. 예상시간보다 1시간 일찍 나와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난리 통에도 샤워기를 차지해서 머리도 감고 샤워까지 깔끔하게 하고 나올 수 있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출구로 향하는데 실랑이가 들렸다. 30분 전에 입장한 한 아주머니가 3일 치 입장권을 예매했는데 기상악화로 인해 온천장이 폐쇄되었으니 오늘 요금은 환불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며 직원과 말다툼 중이었다. 그걸 보니 조금 일찍 나온 것 정도는 귀엽게 넘어가줄 수 있었다.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쉽게 바뀌는 내 마음을 보고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데 아들은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나 보다. 다음 날도 비가 오자 아들이 말한다. "엄마, 그 아줌마 오늘도 비 때문에 온천 못하면 어쩌지?"라고. 심각한 표정의 아들이 귀여웠다. '항상 나쁜 일도, 매번 좋은 일도 없다'고 아들에게 간단히 말하고는, 그 분에게도 좋은 일이 곧 찾아올것을 굳게 믿으며 벤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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