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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다움 Oct 24. 2024

남편이 꿈에 그리던 호수는 이곳에 있었다

글레이셔 공원에서 한일 : 산책하다 행군하기(트레일), 보트 타기(호수)

  

  남편은 이상형을 말할 때, '내 마음의 잔잔한 호수를 유지해 주는 사람'이라고 한다.(한때 그 호수 관리자였지만, 지금은 호수에 물수제비를 즐기는 사람. 하하하) 넘실거리는 파도가 있는 바다보다 평온한 호수를 좋아하는 남편이 가장 기대했던 곳은 여기 글레이셔와 이 뒤에 갈 캐나다 벤프였다. 글레이셔가 '빙하'라는 뜻도 모르고 빙하가 만든 U자형 계곡과 호수가 유명한 곳인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차에서 자다가 내린 나와 달리, 남편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감격스러워했다.

[ 보슬비를 감수하고 탄 보트에서 무지개를 보니 감동이 더 크다. 실제로는 선명하게 보였는데, 사진 상엔 매직아이 수준이네. 하하]

  글레이셔 공원에 가면, '맥도널드'에 간다길래 사전 지식이 전무한 나는, 뭐 이곳까지 와서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지? 여기는 뭐가 특별한가? 하며 의아해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곳에 있는 '맥도널드 호수(McDonald Lake)'를 말하는 거였다.(부끄러워서 아무에게도 말 못 하다가 여기에 씁니다. 하하하)  마침 보트 마감 1시간 전에 도착했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였으나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마법의 문장을 중얼거리며 힘차게 노를 잡았다. 호수도 이런 남편을 반겼던 걸까. 빗방울이 점점 약해지더니 멀리 보이는 산을 배경으로 커다란 무지개가 뜨며 햇살이 빼꼼 보이기 시작했다. 로우 보트(Row boat)였기에 눈뿐만 아니라 팔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는 점에서 매우 바빴지만 동시에 활력이 넘쳤다

[로우 보트, 모터 보트 모두 만족스러웠다. 바람을 맞으면서 호수 한복판으로 내달릴 때 상쾌하고 짜릿했다 ]

  글레이셔에 오자마자 탔던 로우 보트가 흡족했던 우리 가족은 다음 날엔 다른 선착장에서 모터보트에 도전한다. 출세를 하면 이런 기분일까? 전날 로우보트도 좋았지만, 버튼 하나에 부왕-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호수 한복판으로 내달리는 보트에 몸을 싣으니 입이 다물 수 없었다. 특히 두 가지 보트의 주 운전자였던 남편의 경우 전날에는 멀리 나간 탓에 후반부로 갈수록 얼굴이 잿빛이 되었는데, 모터보트를 탄 날에는 잇몸이 만개한 미소를 시종일관 보였다. 호수가 엄청나게 커서 수평선이 보이지 않았는데, 동시에 호수가 맑아서 선착장에서 호수 바닥에 돌이 훤히 보이는 게 신기했다. 자꾸만 물속에 손을 담그고 싶은 매력적인 호수였다.

  

[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가면  멋진 풍경이 계속 나온다. 사진 찍다보면 반나절이 훌쩍. 어머님 아들은 또 심장 떨리는 사진 연출중 이다. 이번엔 참지 않고 외친다. 자중해! ]

  

  글레이셔 공원 하면 맑은 호수를 떠올리지만, 동시에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인 'Going-to-the-Sun Road'로도 유명하다. 웨스트 글레이셔(West Glacier)에서 이스트 글레이셔(East Glacier)까지 험준한 절벽을 따라 이어진 도로(약 80km)이다. 웅장한 산봉우리와 깊은 계곡을 파노라마 뷰로 한 번에 볼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내려오는 길에 유명한 Logan Pass에 내려서 트레킹을 하려 했으나 주차장에 자리가 없어서 다음날 셔틀버스를 타고 올 것을 기약하며 아쉽게 내려왔다.


 

   글레이셔는 험준한 도로 때문에 다른 곳에 비해 셔틀버스가 작다. 수요보다 공급이 적은 셔틀버스를 제시간에 타려면 서둘러야 얘기에 아침 8시 반부터 셔틀버스를 기다려서 탔다. 셔틀버스를 타고 어제 못 갔던 Logan Pass에 내려서 유명한 히든 레이크 트레일(Hidden Lake Trail)을 향했다.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를 향해 걷는 코스였는데, 길가에 다양한 야생화도 있고, 야생동물들도 간혹 등장해 심심할 틈이 없었다. 특히 이곳의 대표적인 야생동물 마운틴 고트(Mountain Goats)를 멀리서 발견하고는 가까이서 보겠다는 일념하에 자발적으로 트레킹에 참여했다.

[ 제일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엉덩이를 대고 쭉 내려오겠다는 말에 손사래를 치며 막느라 진땀 뺐다. 바지가 젖어서 찝찝해질 일 따위는 안중에 없던 아들이었다. 허허 ]

  중간에 눈이 쌓인 곳도 아이들의 흥미를 자극하는데 충분했다.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겨울에 내린 잔설이 남아있는지 꽤 많은 눈이 있던 오르막이 있었다. 애들이 눈을 만지며 놀면 잠시 쉬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아들들은 누가 먼저라 할거 없이 눈이 쌓인 경사면을 오르는가 싶더니 한참 가서 다시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다리는 잠시 앉아서 쉴 수 있었지만, 행여 아이들이 미끄러질까 염려하며 '조심해! 뛰지 마!'를 래퍼처럼 속사포로 질러대던 순간이었다.

  약 2시간 정도의 트레킹이었는데, 아이들이 별 투정 없이 잘 따라와 줘서 기특했다. 꽃, 동물, 눈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요소들로 꽉 들어찬 트레일 덕분이었다. 그래서 탄력 받은 김에 오후에는 세인트 메리 레이크(St. Mary Lake)에 있는 3개의 폭포를 보는 트레일(Three Falls Trail)에 도전했다. 폭포(Bridal Veil Falls, St. Mary Falls, Virginia Falls)를 다 보고 나면 보상으로 아이스크림까지 사준다는 말에 신이 난 아이들의 첫 발걸음은 매우 가벼웠다.

[ 폭포 3개를 섭렵하겠다고 시작한 5시간 트레킹. 사진으로 보니 굳이 폭포 3개를 다 갔어야 했나 싶은데...집착이 이렇게나 무섭습니다. 하하]

  그런데 한 가지 잊은 게 있었다, 한낮의 트레킹은 흡사 삼보일배(三步一拜)와 같다는 것을. 세 발짝 가고 징징 거리는 아이를 달래기를 반복해서 겨우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간에 쉬어가는 시간을 포함해도 그늘이 거의 없는 땡볕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산길을 약 5시간 걷는 것은 어른인 나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중간에 셔틀버스 타는 곳까지 돌아가거나 끝까지 트레킹을 마치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에 놓였을 때는 어차피 힘든 거 가기로 했다. 그리고 도착했을 땐, 우리가 해냈다는 그 성취감에 양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렇게 하루에 트레킹만 7시간 하고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숙소로 온 게 6시였으니, 거의 9 to 6로 직장 출근하듯 매우 열정적으로 트레킹을 한 셈이었다. 장점으로는 어딜 가도 '그날 넌 5시간을 트레킹 했는데, 그것보다는 적어!'라고 말할 수 있었으며, 단점으로는 금방 간다는 엄마의 말에 속아서 5시간 행군한 게 억울했던지 한동안은 단거리조차 걷기 거부를 했다.(몇 번의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제물로 바친 후에야 다시 트레킹을 할 수 있었다. 하하하)

  다음 날은 차로 이동해서 매니 글레이셔에 유람선을 타러 갔는데 매진이었다. 인터넷으로 이미 매진인 것을 알고, 혹시 현장 예약이 될까 싶었는데 불가능했다. 전날의 밀도 높은 트레킹으로 인해 유람선 탄다고 꼬셔서(?) 왔는데, 유람선을 못 타서 어쩔 수 없이 트레킹을 했다. 이번엔 아침이라 따가운 햇살도 없고 1시간 짜리니까 이것만 보고 호텔 가서 맛있는 것 사준다고 설득해서 트레일에 발을 디뎠다. 매니 글레이셔는 모퉁이 돌 때마다  설핏 보이는 호수와 눈 덮인 산이 매력적인 곳이었다.  

  글레이셔 공원에 있는 동안에는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오랜만에 본 파란 하늘에 기분마저 뽀송했고, 볼거리가 다양한 트레일을 걷은 덕분에 아이들의 칭얼거림이 적었다. 산길이 너무 좋은 나머지 가볍게 시작한 산책이 묵직한 행군이 되어버리기도 하고, 호수가 아름다워 이틀 연속 보트를 타며 제대로 즐기기도 했다. 약간의 과함(?)이 있는 글레이셔였지만, 자연을 더 보고자 낸 욕심은 특별한 부작용이 없었다. 

  하루 7시간 트레킹이란 자체 신기록을 세우고 나서 얻은 것이 있다. 바로 자신감과 유대감이다. 이거 하기엔 아직 어리고, 애들에게 무리 아냐?라고 생각하며 한계를 그어버리는 일이 많았는데, 아이들을 다소 도전적인 새로운 상황에 노출시키니 이내 적응하고 결국 해내었는 걸 보고 나도, 아이들도 스스로를 더 믿어주기 시작했다. 또한 혼자라면 쉽게 포기했을 법한 일을 가족이란 공동체 안에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함께 가는 유대감을 배웠다. 물론 우리는 다시 또 쉽게 물러서고, 어느 순간엔 전생의 원수처럼 싸워댈 것이다. 그래도 이전과는 분명 달라진 게 있다. 7시간 행군(?)을 하며 이전보다 단단해진 대퇴사두근처럼,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시간만큼 서로를 이해하며 조금은 더 단단해진 우리였다.

[ 멀리 보아야 예쁘다. 잠깐 보아야 사랑스럽다. 아들(어머님 아들 포함)이 그렇다. 하하하 ]


덧. 셔틀버스를 서둘러 탈 생각에 주차장에 차를 빠르게 주차하고 뛰어서 간신히 버스에 탑승했다. 셔틀버스가 출발하자마자 남편이 큰 소리로 "Wait!"을 외치더니 황급히 차에서 내린다. 셔틀버스에서 한숨 돌리며 우리 차를 보니 창문이 열려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로드트립에서 제일 중요한 차가 위험에 빠졌다고 생각하니 한국말로 "차 문이 열렸어!" 하고는 남편은 냅다 차로 뛰어갔다.

  당황스러움과 미안함은 셔틀버스에 남은 자인 내 몫이었다. 기사님을 비롯해 차에서 대기 중인 사람들에게 수줍은 영어로 상황 설명을 하고는 화끈거리는 얼굴에 고개를 못 들고 있을 때였다. 옆에 계신 할머니가 인자한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해주셨다. "It happens all the time" 누군가의 실수나 잘못에 여유로움을 주는 문장, "그런 건 자주 있는 일이야"라는 말. 인자한 미소와 넉넉한 말투기 함께 머릿속에서 무한 재생된다. 화내고 짜증 낼 있는 상황에서 웃으면서 너그럽게 대처하는 방법을 여행하며 배운다. 여행을 하면서, 인생을 살면서 무슨 일이든 언제든지 일어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덧 2. 이 날 이후 "It happens all the time"이 우리 집 유행어로 등극하기에 이른다. 시작은 훈훈했으나, 뭐든 오용과 남용이 있는 법. 둘째가 내 휴대폰 가지고 놀다가 바닥에 패대기칠 때, 깨진 액정에 울그락불그락 한 나를 보더니, 먼지 한번 툭 털더니 웃으며 말한다. "It happen all the time." 특히 "All~"을 강조하며 인생 3회 차 아저씨 같은 능글맞은 미소로 얼렁뚱땅 넘긴다. 그 후로도 과자 몰래 먹다가 들켰을 때, 비싼 점퍼를 잃어버렸을 때 등등 다양한 상황에서 만능 문장으로 활용 중이다.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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