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 이야기'에서 핵심은 '집을 떠났다'는 것에 있었다
아이와 미국 로드트립을 30일 넘게 했다고 하면 대게 이렇게 말한다.
"와! 좋았겠네. 해보니 어땠어?"
나의 답변은 간단하다.
"여행지는 다 좋았어. 그리고 집이 제일 좋은 걸 알았어."
한국에서 워킹맘으로 살아가는 건 녹녹지 않은 일이었다. 미국에서 노워킹맘으로 사는 변화의 기회가 주어졌고, 긴 여름방학을 나기 위한 방법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미국 로드트립이었다. 여행 계획 등 준비는 남편이 거의 다 했고, 난 여행지에 배경지식도 전무한 상태였다. 그래서였을까. 별 기대가 없어서 큰 실망도 없었다. 오히려 물을 흡수하는 솜처럼 각 여행지의 특색을 직접 부딪히며 내 안에 만족감이 차곡차곡 쌓아갔다. 동시에 여행지를 거듭할수록 그 감탄의 크기가 점차 감소하고 있었다. 분명 내가 원했고, 돈과 시간과 체력을 갈아 넣어 가는 일생일대 다시 오지 않을 여행인데 왜 마냥 기쁘지 않았을까? 왜 여행이 좋기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불편했을까?
답은 '일상'에 있었다. 반복된 일상을 떠나 여행을 훌쩍 떠나니 자유로움을 느꼈고, 동시에 정해진 틀이 있는 일상을 벗어나니 새삼 내가 그동안 누리고 있던 것이 없음에 아쉬웠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막기후에서 거대한 아치를 보기 위해 하이킹을 할 때, 내가 오늘 해야 할 일은 단조롭다. 일어나고, 걷고, 밥 먹고 자는 단순한 생활패턴은 많은 의무로부터 해방된 느낌이었다. 동시에 여행지에서는 냉장고가 없어서 음식을 보관할 때면 언제나 얼음을 구해 아이스 박스에 넣어야만 했고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더운 여름에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할 때도, 평소 같으면 대형마트에서 대량으로 고민 없이 구매했겠지만 여행 시에는 비싸도 낱개로, 혹은 더운 날씨에 버틸 수 있는 양만 사는 게 또 하나의 소비 포인트가 되었다. 텐트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아이와 한참 걸어서 화장실에 가야 했고, 빨래는 몰아서 코인세탁기를 쓸 수 있는 여건이 되는 곳에서만 했다. 만족감은 추상적이었고, 불편함은 구체적이었다.
꿈에서나 그리던 수많은 여행지를 거치고 마지막에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글자 그대로 스위트홈(Sweet Home)이었다. 그리고 여행지와 반대의 상황이 되었다. 집에 오자마자 그동안 먹고 싶었던 식재료를 용량 및 냉장여부에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새벽에 일어나도 화장실이 집안에 있어 쉽게 갈 수 있고, 옷이 더러워지면 쓸 수 있는 세탁기가 건조기가 상시 구비중이었다. 여행하면서 불편했던 사항들이 집에 온 것만으로 많은 부분 해소되었다. 구체적 불편함이 사라진 것이다. 동시에 추상적인 감정들은 급격히 메말라갔다. 그랜드 캐년의 웅장함 앞에서 느꼈던 경외심, 벤프의 에메랄드 빛 호수에서 느꼈던 평온함, 글레이셔에서 5시간 트레킹을 한 후 찾아온 뿌듯함, 새로운 여행지로 향할 때의 설렘 등은 일상에 돌아오니 상대적으로 느끼기 힘들었다.
파랑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주인공이 멀리 여행을 하지만 결국엔 처음부터 가까이에 행복이 있음을 깨닫는다는 것. 여행을 하기 전에는 이 이야기의 시사점으로 '행복은 가까이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파랑새 이야기의 핵심은 '집을 떠났다가 돌아와서 비로소 찾은 행복'에 있다고.
여행 말미에 건강의 소중함을 새삼 느꼈던 것처럼,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매번 소중하게 여기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는 힘들다. 하지만 기존에 누리던 것들이 박탈된 경험 후 다시 돌아왔을 땐 같은 상황도 다르게 보인다.
예를 들면 캠핑을 하다가 밤에 제일 걱정되었을 때는 비가 쏟아졌을 때였다. 혹시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들어오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빗줄기가 굵어지고 소리가 요란해지면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여행 후 비 오는 날 밤에 침대에 누우면 새삼 탄탄한 지붕이 있음에 안도하며 편안함은 느낀다. 만약 내가 밤에 텐트 안에서 거센 빗소리를 듣는 경험이 없었다면, 여전히 지붕의 고마움 따위는 몰랐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일상의 당연함을 특별함으로 바꿔주는 힘이 있었다.
동시에 여행지에서의 특별함을 일상에서 발견하는 안목도 여행 후 얻게 된 장점이었다. 비록 경외심을 느낄만한 자연환경 등은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없지만, 그때의 경험으로 쌓인 감정들은 세포에 남아 비슷한 것을 보고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오후 2시에 베란다에서 햇빛을 쬐면, 녹지 않은 눈과 청명한 호수가 멋졌던 글레이셔의 햇살이 떠오르며 그때의 벅찬 감정이 되살아 난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다소 우울한 날에는 벤프 호수에 가기 전에 내렸던 폭우가 떠오르고, 비가 그친 후 맑았던 호수가 연달아 생각나며 조금 나아지기도 한다. 평범한 냉동피자를 먹을 때도, 시카고에서 먹은 두꺼운 피자가 생각나면서 당시 행복했던 기분도 되살아 난다.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면 여행 후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병약해진 몸뚱이'와 '마이너스로 가득 찬 통장잔고'가 있다. 운동도 다시 시작하는데 컨디션 회복이 쉽지 않고, 돌아가기 망설여지는 회사를 복직해야 하는 중대한 사유가 생겼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음의 파랑새를 찾았음에 만족한다. 소위 '집 나가면 개고생'을 체험해 보고 나서야, 같은 상황이지만 이제까지와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아이들과의 긴 로드트립을 통해서, '더 늙어버린 신체'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난 빚'이 생겼지만, 동시에 '일상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알게 된 덕에 내일이 기대된다.
덧. 원래는 여행 정보도 자세히 쓰고, 여행지에서 숙소(텐트, 티피, 랏지, 모텔, 호텔 등) 비교도 해보고, 여행지에서 만난 크고 작은 사건들도 나열하고, 여행자의 소회도 구구절절 풀고 싶었습니다.(이렇게 원대하고 완벽한 계획을 머릿속에 채우느라 '미룬이'로 2달을 보냈습니다. 하하)
하지만 현실적인 제약에 부딪혀 당초 예상보다는 간략하고 압축된 형태의 글로 브런치를 마무리합니다.(줄이는 것 또한 쉽지 않아서 좌절하고 지연되기도 했지요. 허허) 부족한 글임에도 많은 분들이 읽어주신 덕분에 브런치북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나중에 아이들이 이 글을 읽었을 때 함께 했던 시간을 추억하며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동시에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도, '여행지에서의 추상적인 만족감'과 '일상의 구체적인 소중함'을 조금이나마 함께 느끼셨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