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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어 모지민 Oct 27. 2024

가을 가을

가을 하루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가 있으니

색을 갈아입은 자연을 벗 삼아 숨 쉬는 하루 그저 아름답기만 하여라


가을 햇살

봄 볕은 며느리에게 가을볕은 딸에게

이토록 무서운 옛말이 있으니 보약 지을 돈 없는 나도 가을볕 덕좀 보자


가을 거리

멋을 잔뜩 낸 사람들이 트렌치코트로 낙엽 굴러 다니는 거리를 쓸어 재끼는데 나는 더 이상 그 트렌치를 입지 않아. 멋이 웬 말이더냐. 걸리적거리는 건 이제 그만!


가을 운동회

수십 년 전 폐교된 내 고향 내리 초등학교는 텅텅 빈 채로 잡초만 무성하구나.

그 옛날 운동회 때 뛰어놀던 아이들은 다 어디서 무엇이 되었을까. 난생처음으로 이런 것이 궁금한 걸 보면 내가 나이가 든 것일까.


가을 건강

끼순이: 선생님 우루사 좀 처방해 주세요

의사: 간수치는 정상입니다만

끼순이: 주세요. 디지겠어요

병원에서 처방받은 우루사로 가을 살아내기


가을 가족

24시간 집에 처박혀 있는 예브게니. 제 발로 집 밖을 나가본 적 없는 모모.

나는 무기력해서 현관문을 열 수가 없고 우린 집구석 우린 핵가족!


가을 가방

번개장터에서 산 만 원짜리 천 가방. 몸은 하난데 가방은 몇 개 이더냐. 1년은 고작 365일. 어쩌다 하는 외출. 저걸 다 들려면 몸이 백 개라도 모자라.


가을 신발

다시는 안 사겠다고 했는데 번개장터에 다 팔아 치웠는데 50 퍼센트 세일을 무시하기엔 난 너무 연약한 참새.

인생 마지막 크록스를 사면서 다시는 사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가을 하늘

높게 걸린 구름. 그 구름 사이를 나는 철새. 가을 하늘엔상서로운 동양화가 수도 없이 그려졌으니 따로 미술관 가는건 생략하자.


가을 독서

노벨 문학상 수상한 한강 책을 사 전철에서 한 페이지 읽고 포기했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노안이 내게도 찾아온 것이다.


가을 영화

와킹 댄스 천재 해준 딸내미의 영화 공작새 개봉으로 생에 첫 모더레이터를 맡게 되었다.

영화 모어 때 몇 번 갔던 인디스페이스도 오랜만이구나. 새로운 일, 참말로 기대가 되누나.


가을 커튼

밤이고 낮이고 커튼을 열지 않아.

곡식을 익게 하는 가을 태양은 유난히 뜨겁거든. 넷플릭스 지옥에서처럼 타 죽긴 싫은가 보다.


가을 붕어빵

그 옛날 CF에서 김혜자가 했던 말. 그래, 이 맛이야!


가을 정

먹고살기 각박한 세상. 오고 가기는커녕 서로들 인색하기만 하다.


가을 엄마

고관절이 깨진 엄마. 왜 걷지를 못해!


가을 아빠

뇌혈관이 막힌 아빠. 왜 말을 못 해!


가을 저녁

아침은 쌀쌀하고 저녁은 선선하구나. 하지만 이 가을은 온 듯 만 듯 게슴츠레 가버려


가을 달력

얼마 전부터 다시 시작한 크로키 누드모델 수업 스케줄로 빼곡하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느라 발이 곰 발바닥 되었다. 그 발을 수많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그리고 있다.


가을 옷

미스터리가 아닐 수가 없다. 어떻게 매번 입을 게 없을까. 1년 이상 안 입은 옷 그만 쳐 박아 두고 싹 다 청산하자. 그렇게 매번 끊임없이 결의를 다져 보지만,,,


가을 음악

해외 배송으로 시킨 patricia barber의 신보. 적적한 영혼을 적시는 음악이 있어 나는 너무 다행이다.


가을 라디오

언제나 그 주파수를 지키고 있는 디제이들. 부디 오래 계셔 주세요!


가을 친구

제기랄, 아무도 연락이 없구나. 너흰 외롭지 않은가 보구나. 무정한 것들!


가을 유튜브

여행 유튜버들 최선을 다해 쫓아다니면서 봤으니 이제 그만 구독 취소 하리.


가을 마음

해가 다 가는데 대체해 놓은 게 뭣이다냐. 풍요롭지 않은 가을.

내 마음은 사막도 아닌 것이 산울림이 부르는 황무지 일세


가을 편지

가을엔 편지를 쓰겠어요.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가을 편지를 부르던 김민기는 세상에 없고 나는 그 음악을 들으며 딱히 편지할 사람이 없다.


가을 결별

잘해주던 사람을 별거 아닌 사건으로 인해 차단했다. 사람 관계 끊는 건 너무 쉽다. 청산의 가을.


가을 연습실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좋아. 징글징글한 여름이 가서 좋아. 좋아 좋아 나는 좋아.


가을 운전

가을 하늘 높고 공활한 것이 가는 곳이 다 내 세상이구나. 얼씨구나 좋다구나


가을 마트

나만 빼고 온통 비싸서 꼭 필요한 계란만 사 왔다. 내 생명을 지켜주는 닭들에게 새삼 고마움과 미안함을.


가을 파리

시몬 너는 아느냐 낙엽 밟는 소리를

파리 7 구역에 사는 앙리는 잘 있겠지. cava?


가을 버스

버스가 다이어트를 했나 여름 보다 사람수가 적다. 시원해서 덜 북적거리게 느껴지는 건가. 여하튼 난 좋다


가을 뱃살

말은 살찌고 내 배는 언제 이렇게 나왔더냐. 소리도 없이

깡 마른 몸에 배라니 이천이십사 년에 이런 일이. 하늘이시여!


가을 이발

커피 드립 용기 둥그런 부분을 정수리에 대고 이발기로 밀다가 망했다.

그나저나 커피 드립 용기로 머리 민 사람 보기나 했니. 털 난 물고기 모어의 셀프 이발 엔간하다


가을 카톡

아무개: 모어님 예전에 작업한 사진이 다 날아가서요 혹 가지고 계세요?

끼순이: 그럼 그렇지 그러니까 네가 연락했지


가을 통장

여전히 비었구나. 엄청난 고집이구나. 비움의 미학!


가을 비

한증막 같았던 여름 불볕더위를 적셔 주는구나. 땡큐 쏘 마치


가을 넷플릭스

시즌 2로 돌아온 것들. 울궈 먹는 것들. 돈이면 다 되는 것들.


가을 피로

일어나기가 여간 힘들다. 자다 소리도 없이 가버렸음 소원이 없겠다.


가을 커피

이제부터는 1500원짜리 이상의 커피는 사 마시지 않으리. 맛도 없는 커피를 내 피 같은 돈 주고?


가을 운전

200일 무사고 감사하다며 이메일이 왔다. 사고 내면 보험비 올라가고 그 돈이 얼만데

미쳤어? 또 사고 내게. 안 그래도 인생에 사고 칠일 투성. 나는 감당이 안돼


가을 숨바꼭질

모모가 숨었다. 엄마 나가야 되는데 모모야 어디 있니. 버스가 오고 있다. 놓치면 큰일이다. 제발 어서 말 좀 해다오. 촌각을 다투다 집을 나왔다. 모모야 그러지좀 마라.


가을 운동화

작년에 이태리에서 사 온 구찌 신발. 번개장터에서 찜해 놓고 사겠다고 가격 조정해 달란 것들이 끝까지 안 사는구나. 그렇다면 이제 내가 신어 주리라. 그러고 보니 평생 명품 신발 한번 신어 본 적 없는 발이구나.

이것은 역사적인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내친김에 작품이나 짜야겠다. 제목! 나는 구찌를 신고 춤을 추었네


가을 청소

예브게니가 땀 뻘뻘 에구구구 열심이다. 난 그저 우아하게 지켜 보리. 내 손에 피 묻히며 살 순 없지.


가을 알바

가기 싫어서 꺼이거이 울고만 있다.


가을 나들이

집이 최고 밖은 위험. 절대 나가지 않으리라!


가을 뽀뽀

예브게니: (얼마 전 사준 옷을 입고) 나 예쁘지? 고마워

끼순이: 응 너무 잘 어울린다

나를 꼭 껴안는다. 에라 모르겠다. 입도 갖다 대자. 살결이 부딪히자 전기가 흐른다. 근데 그게 다다.

부부 관계 폐업한 지 십수 년!


가을 점심

이지송 오라버님: 밥 먹으러 와라. 돼지고기랑 이것저것 좀 있다. 네가 와서 요리 좀 해

끼순이: 전 흑백 요리사가 아닙니다

이지송 오라버님: 그럼 회색으로

끼순이 : 웃어야 할까요


가을 초상

백세를 채우지 못하고 땅으로 들어가신 고모. 부디 영면에 드소서


가을 가을

시월이 십 칠일 일요일 어제는 어느 때보다 완연한 가을 날씨였는데 오늘은 흐릿하다.

이제 추워질 일만 남았다. 날씨 타령 집어치우고 살아 내야 할 삶에 열중하자!


가을 안개

안갯속에 외로이 하염없이 나는 간다 (정훈희 안개 중에서)

그렇게 하염없이 걸어가는 것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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