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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이 Oct 25. 2024

최악의 숙소에서, 최고의 숙소로

이런 게 원효대사 해골물인가요



당초 3일만 있으려던 발리 꾸따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일주일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슬슬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못내 아쉬워서 하루씩 더 눌러앉은 탓이다.


왜 ‘발리한달여행’이 아니라 ‘발리한달살기’라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여행이 아니라 정말 일상을 살고 있었다. 내 하루의 가장 중요한 일정은 노을을 보는 거였다. 햇볕이 따가운 낮에는 방에서 글을 쓰거나 수영을 하면서 보내고, 늦은 오후가 되어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바다를 향해 걸었다. 노을을 배경 삼아 해변가를 뛰면 늘어선 노점상의 상인들이 인사나 응원을 건네주었다. 한참을 뛰다가 강아지가 많거나 노랫소리가 들리는 곳 털썩 주저앉아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색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바다와 하늘만 보고 있어도 좋았다. 그러다 완전히 어두운 밤이 되면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털고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그러면 문 앞을 지키던 경비아저씨가 웃으면서 오늘도 운동을 하고 온 거냐고 맞아주다. 그새 나는 이 모든 것들에 정이 들어버렸다. 이렇게만 한 달을 보내도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지만 또 다른 곳에서 펼쳐질 일들도 궁금해서 나는 발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어차피 꾸따는 공항에서 가깝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들를 수 있었다. 익숙한 풍경들과 바다와 서핑 선생님에게 꼭 다시 돌아오겠다는 인사를 전하고 캐리어를 끌고 나섰다.


내 여행의 다음 목적지는 우붓이었다. 사실 꾸따-스미냑-짱구로 이어지는 해변가에서 발리의 심장이라 불리는 정글 우붓으로 향하는 것은 발리 여행의 정석과도 같은 코스다. 그렇지만 숲에는 별 관심이 없고 바다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우붓이 딱히 끌리지 않았다. 6년 전에도 우붓을 가보긴 했는데, 딱히 감흥이 없어서 뭘 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 그렇지만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숲을 좋아한다고 하니까, 지금의 나한테는 오히려 유유자적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호텔 수영장에서 만난 인도인 신혼부부가 나에게 우붓이 너무 좋았다고, 꼭 가보라고 추천한 탓에 귀가 얇은 나로서는 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어마어마한 교통체증을 뚫고 우붓에 당도한 순간, 차 창문을 통해 보이는 우중충한 회색빛 하늘에 나는 당장 맑고 화창한 꾸따의 바다가 그리워지고 말았다.


그 마음은 숙소에 도착하자 더욱 커졌다. 우붓에는 가성비 좋은 호텔이 거의 없고, 신혼부부들을 위한 비싼 리조트가 대부분이었다. 대충 1박에 3~4만 원 정도로 적당히 깔끔해 보이는 홈스테이 숙소를 찾았다. 후기도 좋고 방도 넓고 수영장에 욕조까지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그랩 택시가 내가 예약한 숙소라고 내려준 곳은 시골 할머니댁 같은 허름하고 벽에 이끼가 가득한 건물이었다. 마당에는 닭과 개들이 있었고, 돌벽에는 달팽이와 송충이 같은 벌레가 기어 다녔다. 헉... 정녕 내가 이곳을 3박이나 예약했단 말인가. 환불되나? 그러는 와중에도 닭들은 계속 큰소리로 울어댔다.


좀 더 들어가니 수영장이 있었는데, 수영장 위에는 나뭇잎과 자잘한 먼지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개인이 관리하는 숙소인지라 내가 꾸따에서 묵었던 호텔에서 관리하는 수영장과는 비교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대체 이 더러운 수영장에 누가 들어간다는 거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주인아주머니가 열어주는 현관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모기 몇 마리가 날아올랐다. 뻐킹 모스키토! 속으로 비명을 삼키며 기겁하는 나와 달리, 아주머니는 마치 그 모기들이 있어야 할 곳에 제대로 있다는 듯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미소를 보낼 뿐이었다. 숙소를 예약한 아X다 측에다가 사기광고였다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한 가지 교훈을 새겼다. 침대에 모기장이 있다? (그게 공주 침대처럼 예뻐 보이든 말든) 일단 그 숙소는 모기가 있다는 뜻이니 거르자.


대충 짐을 풀고(혹시라도 벌레가 캐리어에 들어올까 봐 맘 편히 풀지도 못했다), 시내를 돌아보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 숙소에서는 자전거를 빌려준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주인방 문을 두드렸고, 아까 나를 맞이한 아주머니 대신 아저씨가 나왔다. 저 자전거를 빌리려고요. 그러다 아저씨가 전혀 못 알아듣겠다는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엥? 아X다에서 이 숙소는 무상으로 자전거 빌려준다고 되어 있었는데요? 알고 보니 그 또한 거짓 정보였다. 그 말만 믿고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숙소를 잡았는데, 뻐킹 아X다! 나는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돌아 나왔다. 까짓 거, 내 발로 걷지 뭐.


그런데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심상치 않던 잿빛 하늘에서 빗방울이 투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발리에서 자유인처럼 돌아다닐 생각을 하며 안일하게 우비는 챙겼지만 우산은 챙기지 않았었다. 발리가 아무리 휴양지라지만 일상에서 우비보다 우산이 편한 것은 당연한 것이거늘! 표정이 굳은 나를 보고 주인아저씨가 혹시 우산이 필요하냐고 물어보았고, 기꺼이 본인 우산을 빌려주다. 아마 자전거를 못 빌려준 것에 대해 미안해서 그런 것 같았다. 나는 죄송하고도 감사한 마음으로 우산을 들고 나왔다. 이렇게 된 거 맛집이라도 가고 말 테다.


하지만 우산은 소용이 없었다. 나는 원래 여행 갈 때 날씨 운이 안 좋은 편이다. 날씨요정의 반대말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대충 날씨요괴라고 친다면 그 녀석이 나를 쫓아다니는 게 틀림없다. 거의 폭우라 할 수 있을 정도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도로 옆으로 홍수가 나기 시작했다. 사실 발리의 도로는 꽉 막힌 도로와 그 사이를 누비는 오토바이로 평소에도 엉망진창인데, 빗속에서 서로 물을 튀겨대니 더욱 아수라장이었다. 나는 거의 물살을 헤치고 헤엄치는 듯한 기분으로 간신히 우산으로 얼굴만 막으며 발을 떼었다. 그렇게 도달한 숙소 근방에서 가장 구글맵 평점이 높았던 그리스식 맛집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구글, 너마저…!”를 외칠 수밖에 없는 맛이었다.


배를 채우고 나니 잠시 빗줄기가 잦아들었다. 그때 그냥 곱게 숙소로 돌아갔어야 했는데, 우붓에 왔으니 유명한 발리 요가 수업을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새 해가 져서 어둑해진 길을 헤매서 간신히 도달한 요가반은 내가 생각하던 여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아니라, 빗물에 젖은 축축한 발을 제대로 닦지도 않은 약 육십 명의 인원이 한 공간에 누워있는 다소 충격적인 광경을 보여주었다. 그 사이를 거니는 강사의 영어로 나지막이 읊조리는 목소리와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니 웅웅 거리는 백색소음들 사이로 왱왱 거리는 모기소리가 더 날카롭게 들려왔다.


숙소로 돌아오니 당장 쓰러질 것 같았다. 꾸따에서 서너 시간 걸려서 우붓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폭우를 헤치고 돌아다닌 탓이었다. 빗물 젖은 신발을 신고 돌아다닌 발이 여기저기 채여서 퉁퉁 부었다. 에어컨을 켜자 금방 방안이 쾌적해졌다. 습한 옷들을 널어 두고,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았다. 깨끗하게 샤워를 하고 욕조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았다. 온몸의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깨끗한 옷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 모기 한 마리가 눈에 보였지만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나는 오늘 하루종일 돌아다니며 얼마나 많은 벌레를 마주쳤던가. 벌레가 많은 건 우붓이라는 지역의 어쩔 수 없는 특성이었다. 그에 비하면 모기가 단 한 마리밖에 없는 방이라니, 쾌적하기 그지없게 느껴졌다. 내일도, 모레도 비가 많이 올 예정이라고 했다. 그냥 밖으로 안 나가고 숙소에서만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 발을 디뎠을 때에는 이 방에서 맘 놓고 편히 못 쉴 줄 알았다. 그런데 모든 것은 상대적이었다. 험난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니 이런 아늑한 방의 존재가 그저 감사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오늘의 폭우는 날씨요괴의 짓이 아니라, 계속 투덜거리고 불평하기 바빴던 나에게 상대적으로 쾌적한 방을 주기 위한 하늘의 큰 뜻이 아니었을까?


새벽에 잠결에 큰 천둥소리를 몇 번 들었던 것 같다. 밤새 내릴 비가 죄다 내렸는지, 아침에 눈을 뜨고 커튼을 걷었더니 날이 개어서 창밖이 화창했다. 바로 눈에 보이는 수영장 물이 맑고 청량해 보였다. 어젯밤에는 그리 더러워 보이더니.


밖을 내다보는 나와 눈이 마주친 주인아주머니가 아침식사 메뉴를 물어보셨다. 나는 팬케이크를 부탁드렸다. 꾸따에서의 호텔 조식과는 사뭇 다른 가정식 팬케이크가 나왔다. 아주 맛있었다. 아침식사를 하고 잠깐 앉아서 쉬다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에 들어가서 시원한 물에 몸을 뉘었다. 어제 이 더러운 물에 누가 들어가냐고 생각했던 사람? 바로 여기 누워있습니다.


이후로도 우붓에서 지내는 동안 하늘은 대개 흐렸고, 종종 비가 왔지만, 첫날의 충격적인 폭우를 생각하면 그 정도는 감사하며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혼자서 몽키포레스트도 가고, 래프팅도 하고, 계단식 논도 구경하면서 마음을 열고 우붓을 즐겼다.


결국 처음 예약했던 3일이 지나고, 나는 또 하루를 더 연장했다. 우붓을 떠나는 날, 첫날 기겁했던 모든 것들이 그새 친숙하게 느껴졌다.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길에 마주한 벽에 붙어있는 달팽이에게도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넸다.


고작 하루만에 당장 뛰쳐나오고 싶었던 최악의 숙소가 더 머물고 싶은 최고의 숙소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항상 늘 새로운 것을 경계하고 지나간 것을 그리워한다. 그러다 보니 지금 당장 마주하는 것들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간 것은 미화되기 마련이다. 지금 이 순간도 지나자마자 바로 그리워할게 뻔하다. 그러니 항상 매 순간을 충실하게 보내야지, 또 다짐해 본다.


하늘에도, 땅에도 구멍이 뚫린 게 틀림 없었던 우붓의 폭우...
소박하고 정갈한 바나나 팬케이크
우붓 몽키포레스트에서 만난 원숭이
안녕, 잘 있어 달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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