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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이 Apr 22. 2024

비치클럽에서 외쳐보는 "나는 술이 싫어요"

(주의: 술 먹고 쓴 글입니다)



혼자여행을 다니면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가 더욱 명확해지고 있다. 오직 내 마음가는대로 행동하는 내 여행은 알콜프리(Alcohol-free).


술을 좋아하는 사람을 애주가라 한다면 그 대척점에 있는 나는 혐주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술을 싫어한다. 이건 나의 취향이나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태생적 한계 같은 거다. 아메리카노도, 자몽도, 하다못해 토닉워터도 잘 못 먹는 나는 아마 쓴맛을 느끼는 미각세포가 유독 발달한 게 분명하다. 아주 조금의 알코올이라도 혀에 닿는 순간 그 쓴맛에 거부감이 든다. 가령 남들이 음료수라 말하는 이슬톡톡 같은 거라도.


알코올을 거부하는 것은 비단 내 혀뿐만이 아니다. 맥주 한 잔만 마셔도 내 온몸은 불타오른다. 술 마시고 필름이 끊긴다는 기분이 어떤 건지 너무나도 느껴보고 싶지만, 그 상태로 가기 전에 나는 토하거나 머리가 아파서 기절하거나 혹은 둘 다 한다. 오타쿠적으로 비유하자면 마치 <나루토>의 ‘밤 가이(몸이 에너지를 견디지 못해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궁극의 기술)’ 같이 한계까지 개방하고 싶어도 신체가 못 따라주는 그런 상황이라 볼 수 있다.


술을 잘 못 먹는 건 나의 오랜 콤플렉스 중 하나였다. 어릴 때부터 조용한 범생이였던 나는 잘 노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엄마도 아빠도 술 먹고 취해서 잘 노는 거 같길래, 나는 나도 그럴 줄 알았다. 고3 수학여행 때 처음 마셔본 소주는 별로 안 독하게 느껴졌다. 오, 나는 술 잘 먹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착각하고 들이킨 탓에 그날 생애 처음으로 술 때문에 토했다. 그 뒤로 대학생 새내기 때 온갖 동아리에 가입하고 엠티에 참여하면서, 몇 번 더 실수를 한 뒤에야 나는 내가 대단한 술찌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늘 술자리에서 나는 구석에 엎드려 자고 있기 일쑤였다. 그래도 다행인 건 30분쯤 자고 나면 또 금방 깨서 집은 잘 들어간다는 것(어찌보면 애초에 마시는 이 적으니 당연한 거다). 오히려 실컷 놀고 뻗은 친구들까지 잘 챙겨 보낸다.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뒤치다꺼리만 한다니, 여러모로 개손해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술에 대해 대단히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는 걸 모르는 친구들이 종종 내 콤플렉스를 후벼 팠다. 절친한 친구들 중 몇 명이 취해서 “네가 술만 잘 먹었으면 진짜 최고였을텐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술에 취해서만 나눌 수 있는 얘기가 있다고 했다. 나는 술 없이도 얼마든지 진솔한 대화가 가능한 사람인데.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술에 취해서만 할 수 있는 대화라는 게, 술에 취해서만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라는 게 진정한 자기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아마 태생이 다른 거겠지.


왜 나는 빼고 모이냐고 물었을 때, 내가 술을 안 먹기 때문에 나를 배려해서 안 불렀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다수에 편승하길 좋아하는 나는 살면서 소수가 되어본 적이 별로 없는데, 술에 대해서는 한국에서 내가 소수자 같았다. 해산물을 못 먹는 친구를 보고 “이 맛을 모르다니!” 하고 가여워한 적이 있는데, 그보다 술의 맛을 모르는 게 훨씬 더 불쌍한 것 같다. 술이 열어주는 관계와 세상이 분명 있는 것 같은데.


어쨌든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더 나는 꼭 필요한 자리가 아니면 술을 안 먹게 됐다. 회식도 거의 없는 회사라 술이 꼭 필요한 자리 자체가 드물긴 하다. 그렇지만 비교적 최근에, 나는 술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들이킨 적이 있다.


때는 약 1년 반 전,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이었다. 월드컵 덕후인 나는 대한민국 vs우루과이 전을 회사 사람들과 술집에서 봤었다. 비록 무승부로 끝나긴 했지만 같이 손에 땀을 쥐고 응원하는 게 정말 재밌었다. 그래서 그다음 대한민국 vs가나 전도 여럿이서 보고 싶었지만, 축구에 별 흥미가 없는 부서 사람들은 나랑 같이 안 봐줬다. 결국 나는 독서모임에서 월드컵벙을 열기로 했다. 술집을 예약해서 다 같이 큰 스크린으로 응원하면서 보면 너무 재밌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다소 어색한 사이의 6명이 모이게 되었다.


그때 내가 간과한 것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로, 내가 예약한 술집이 원래는 헌팅포차로, 아주 핫한 곳이라는 것. 그걸 미처 모르고 예약한 나는 들어가자마자 대학생 젊은이들이 테이블에 올라가서 춤추면서 응원하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곳은 아예 나와 다른 종족의 사람들이 오는 곳이었다. 나보다 약 10살은 젊은 친구들의 목청에 고막이 터질 뻔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 모임에서는 내가 막내였다. 나보다 어르신들은 오죽 힘들었을까…. 평균연령이 30을 훌쩍 넘는 우리는 그야말로 그 술집의 뒷방 늙은이들이었다. 심지어 그날 나와 처음 얼굴을 마주한 분도 계셨는데, 우리는 그 소음 속에서 인사 한 마디 제대로 나눌 수 없었다.


두 번째, 가장 결정적으로, 우리 모두 알다시피 그날 경기는 2:3으로 대한민국이 패배했다. 특히 전반전 결과는 0:2로 아주 처참히 발리고 있었다. 나는 대한민국이 가나한테 질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다. 피파랭킹을 너무 맹신한 탓이다. 스포츠 경기벙을 열거였으면 질 경우도 생각했어야 했다. 그걸 모르고 모인 우리 테이블은, 가뜩이나 어린애들한테 기가 빨리고 있었는데 더욱더 분위기가 처참해졌다.


그때까지 나는 술 한 방울 안 마시고 있었다. 술이 필요할 거라 생각하지 않아서 차를 가져온 탓이다. 그런데 전반전이 끝나고 쉬는 시간, 애들은 여전히 술 먹고 확성기 들고 응원전을 벌이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모임에서 개중 나랑 친한 분이 나한테 속삭였다. “솔직히, 지금 벙 괜히 열었다 싶죠?” 대답은, Absolutely YES!! 였다. 너무 후회되었다!! 그리고 나도 나지만, 내가 모아서 이 정신 사나운 공간에 침울한 분위기로 있는 사람들한테 너무너무 미안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아, 이건 진짜 술 안 먹고 못 버티겠다. 그래서 소맥을 시켜서 연거푸 건배를 외쳤다.


다행히 후반전에서 우리의 조규성 선수가 헤딩으로 두 골을 넣어주면서, 우리는 다 같이 어깨를 얼싸안고 방방 뛰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때마다 건배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제야 모두 흥이 오르면서, 비록 경기 결과는 2:3으로 아쉽게 패배했지만 그날의 월드컵벙은 독서모임 자체 연말 조사에서 가장 좋았던 벙 중 하나로 랭크되는 영광을 누렸다.


문제는 내가 너무 아찔했던 나머지, 그리고 너무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한 나머지 술을 내 한계까지 마셨다는 거다. 토할 정도는 아닌데 30분은 자야 할 정도였다. 딱 30분만 자면 되는데, 경기가 끝나사람들은 칼같이 집에 가자고 일어섰다. 그 시끄러운 공간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을 테다. 나도 비적비적 따라나섰다. 그날은 하필 비가 왔고, 엔데믹 전이라 다들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몇 걸음 가다가 갑자기 토할 거 같다는 내 말에 다들 기겁하면서 나를 길가 화단으로 이끌었다. 누군가가 쭈그리고 앉은 내 우산을 들어주고, 일단 마스크 벗으라며 벗겨주었다. 주인 모를 “아 이 사람 술 마시면 안 되겠네.”, “와 나 이 모임에서 이렇게 취한 사람 처음 봐.”했던 목소리들이 꿈결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다행히 조금 쉬니까 금방 멀쩡해져서 별일 없이 집에 들어갔다. 훗날 알게 되었는데, 그때 한 사람은 편의점에 비닐봉지를 구하러 가려했고, 나를 집까지 태워준 친구는 내가 자기 차에 토할까 봐 많이 불안했다고 했다. 월드컵벙 자체는 독서모임 최고의 벙 중 하나로 거론되었지만, 그날은 명실상부 2년 간의 내 독서모임 생활 중 최악의 날이자 최고 흑역사였다. 나 원래 그런 사람 아닌데…. 그 뒤로 나는 또 반성하고 술을 잘 조절하고 있다.


갑자기 술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진 것은 내가 지금 술을 먹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라면 모를까, 혼자 술을 마시는 건 내게 정말 희귀한 일이다. 오늘은 최근 발리를 길게 여행했던 친들이 비치클럽을 꼭 가보라고 추천해서 혼자 와봤다(물론 그 친구들은 꼭 동행 구해서 가라고 했지만 동행 구하기 너무 귀찮다). 그런데 기껏 클럽까지 와놓고는 태생이 샌님인 나는 음식만 주구장창 먹고 책 조금 읽고 그렇게 평화롭게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별로 재밌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저녁때가 되자 칵테일을 1+1으로 판다고 했다. 술을 마시면 좀 흥겨워질까, 그래도 클럽인데 술을 좀 마셔볼까 하는 마음으로 시켰다. 그리고 마시는데, 확실히 좀 신면서 이곳이 더 재밌어진 느낌이다! 나 이제 취기를 좀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된 건가? 감개무량이다. 물론 여전히 맛은 드럽게 없지만.


한때 사람들이 술을 왜 좋아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잘 모르겠고, 심지어는 대한민국이 술을 금지하면 더 평화로워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가장 근본적인 나의 마음은 애주가들에 대한 부러움이다. 이런 알딸딸한 취기와 흥을 잘 즐길 수 있다는 것, 내가 미처 못 느끼는 다양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 그런 게 못내 부러워진다. 대신에 나는 가성비 좋게 칵테일 두 잔에 흥이 오를 수 있으니, 개이득이라 생각하자.


이 글은 Finns 비치클럽에서 쓴 글입니다. 이렇게 광란의 밤을 보내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글을 쓰고 있는 샌님 1...^.^ 그 사람이 바로 나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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