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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JE 마이제 May 10. 2024

쌩 신규 간호사의 병동 탈출기

03 취업부터 퇴사까지 일사천리

취업은 4학년 여름방학에 이미 결정되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 20년 전 일이다.

대학마다 10~20% 상위 성적 학생들에게는 '인턴십'의 기회가 있었다.

(02편에서 말했지만 결국 대학도 학점관리다)


4학년 여름방학 때 서울아산병원 인턴십 채용 공고가 났고, 나는 그 티켓을 받았다.


기숙사에서 집으로 돌아와 기쁜 소식을 알려드리려고 했지만, 부모님은 나에게 말도 없이 금강산여행을 떠나시고 집엔 아무도 없었다. 화장대를 뒤져 비상용 카드로 혼자 백화점에 가서 정장 한 벌을 빼입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들어갔던 매장은 '미샤'였다. 금강산에서 돌아오신 엄마에게 등짝 한 대 세게 맞았다. ㅠㅠ 벌어서 갚을게 엄마. 정장은 처음이라 다 이렇게 비싼 줄 알았지. 껄껄.)


면접과 적성검사를 보고 바로 인턴십 체험을 했다. 지원한 곳은 '산부인과' 또는 '정신건강의학과'였다. 그리고 나는 '산부인과'로 배정되었다. 학생신분이었으니 나는 당연히 병풍처럼 서서 선배간호사들의 처치과정을 관찰하기만 했다. 가끔 허드렛일을 돕기는 했지만 대체로 병풍처럼 가만히 서서 바라보는 것이 다였다.


학생시절 모성간호학을 배운 내가 생각하는 산부인과는 '탄생의 기쁨'이 넘치는 곳이었다.


하지만, 3차 병원의 산부인과는 탄생의 기쁨은 극 소수였고, 대부분 암환자로 죽음의 그림자가 훨씬 짙은 곳이었다. 지금이야 인식이 나아졌지만 20년 전만 하더라도 '자궁'이나 '난소'를 잃는다는 것은 거의 '여성성'의 상실을 뜻했다. 그래서 병동의 분위기는 몹시 무겁고 어두운 편이었다. 또, '남자 환자'가 많은 병동에는 보호자침대에 아내나 딸 등 가족들이 앉아 병상을 지키기 때문에 그나마도 대화가 오가는 반면, '부인과'에서는 보호자가 없는 자리도 꽤 많았다. 남편들은 모두 돈을 벌러 갔기 때문일까? 어린 마음에 그런 부분도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드물게 산모도 있었다. 대부분 역아출산이거나, 아이나 산모가 기저질환을 가지고 있는 어려운 출산을 해야 하는 산모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표정에는 두려움과 함께 기대감이 서려있었다. 6인실에서 아기를 품은 산모와 자궁을 영원히 잃은 여성이 함께 앉아있었고, 환자들은 각 환자들에게 하는 의료진의 설명이나 처치를 함께 듣고 보았다. 나는 그런 것도 못내 견디기가 힘들었다. 극 F였기 때문이다. 당시에 학생이라 몰랐으나, 아마 간호사들도 산과 환자와 부인과 환자를 최대한 분리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입원실이 환자 수에 맞게 맞춰지지 않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인턴십과정이 끝나고 마지막 설문지에 '가장 피하고 싶은 병동'에 '산부인과'를 기록했다. 병동 간호사선생님들은 너무 친절하고 밝고 좋았지만, 병동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실습 내내 마음이 안 좋았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일과 사적인 감정을 잘 분리할 수 있으나, 그때는 환자들의 감정에 쉽게 동화되는 어린아이였다. 그리고 내가 어쩌면 병원에서 오래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직감 같은 것이 들었다. 순간 지역사회에 나가려면 각종 검사와 약물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원병동으로 '응급실' 또는 '내과'를 지원했다.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 병원 취업 합격 통지를 받았다.

쉬운 취업이었다. 첫 도전에 바로 합격이었으니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병원이고, (내 기준) 서비스나 기술면에서도 가장 우수하다고 생각했던 서울 아산병원 간호사가 되다니. 4학년 내내 어찌나 신나게 놀았는지. 그때 기억이 또렷하게 행복하다. 부모님도 나의 게으름, 방탕함 모든 것을 수용하셨다. "네가 지금 아니면 언제 놀겠냐. 맘껏 놀아라."


인턴십 합격자들은 1월 간호가 국가고시가 끝나고 3일 뒤에 출근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설렘이 더 컸다. 우리는 약 한 달 동안 신규간호사 교육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병원생활 중 가장 융숭한 대접을 받았던 시기였다. 모두가 우리를 보면 웃어주었고, 반겨주었고, 파이팅을 외쳐주었다. 취업도 쉬웠는데, 병원생활도 쉽겠구나. 순진하게도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배정받은 병동은 '내분비내과'였다.

뇌하수체 질환, 당뇨병, 비만, 갑상선질환 등 호르몬계 질환을 다루는 병동이었다. 마음에 들었다.


병동에 투입되어 한 달 동안 프리셉터(멘토)를 따라다니면서 일을 배웠다. 나의 프리셉터 선생님은 매우 엄격한 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분도 3년 차라 내가 첫 프리셉터였기 때문에 '잘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으셨을 것 같다. 병동에 발을 내딛자마자 '태움'이라는 것이 시작되었다. 프리셉터를 원망할 수는 없었다. 인슐린 1mg으로도 사람이 죽고 살고 하는 곳이었으니, 모두가 날이 서있고 예민한 것이 당연했다. 문제는, 내가 그렇지 못한 인간유형이라는 것이었다.


뭐든지 당당하게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스스로 일을 하면 "물어보고 했어야지!"라고 혼이 났고,

'그럼 이건 여쭤보고 해야겠다.' 싶어 물어보면 "아직 그것도 몰라?"하고 혼났다.

웃어서 혼나고, 울어서 혼났다. 매일 눈물바람이었다.


식사시간이 없었고, 근무는 8시간이었지만 2시간 전에 출근해서 환자를 미리 파악하지 않으면 업무파악 자체가 힘들었고, 인계 후에도 몇 시간째 퇴근할 수 없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식사도 하지 않고 아등바등 뛰어다녔지만 선배들에게 야단맞기 일쑤였다. 45kg이었던 몸무게가 39kg이 되었다. 힘들다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압박감이 매일 나를 짓눌렀다.


물론, 좋은 일들도 많았다. 밥은 먹었냐며 입에 떡이며 간식을 넣어주시는 보호자분들도 있었고, 고생한다, 고맙다, 감사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친인척 병문안을 왔던 잘생긴 남자에게 연락처를 받기도 했다. '감사하다'는 말을 들어가며 돈을 버는 직업이 얼마나 될까? 퇴근길에 그래도 오늘 하루 '보람 있었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직업이 얼마나 될까? 나름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좋은 직업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날도 혼나고 있었다. 14개월 차 였다. 이제 많이아니지만 여전히 혼나고 있었다. 하지만 혼나는 것도 익숙해지니 선배의 말은 한 귀로 들어와서 한 귀로 나갔다. 태움 자체는 이제 큰 문제가 아니었다. 


스테이션에서 소란스러운 고함소리가 났다. "여기 수간호사 누구여!! 내가 이 검사 안 한다고 했지!!!!" 오더는 의사가 내렸는데 간호사에게 화풀이하는 것은 환자들의 국룰이었다. 막상 "1301호 환자 화가 엄청났어요. 검사 절대 안 하신다고 난리신데 한 번 와주세요"하고 전화도 잘 안 받는 의사를 불러오면 의사 앞에서는 공손해지곤 한다.


한마디로 간호사가 민원의 창구였다.


환자는 무슨 일만 있으면 간호사를 찾아와 화를 냈다.

의사도 환자 컨트롤이 왜 안되냐고 화를 냈고,

약사도 이 약은 지금 못 올려준다고 간호사에게 화를 냈고(오더는 의사가 냈다),

검사실에서도 이 환자 이때 검사 못해준다고 간호사에게 화를 냈다.


어떤 날은 여기저기에서 화를 내는 전화를 받다가 '허허허 허허허 허허' 미친년처럼 웃기도 했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오더를 변경해야 하는데 며칠째 잠을 자지 못한 담당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수간호사선생님은 환자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그날, 퇴근 후 수간호사선생님께 갔다.

"저 그만두려고요."


수간호사선생님께서는 적잖이 놀라셨다. 그래도 신규들 중에서는  씩씩했던 나였다. 한 번도 수간호사선생님을 찾아가 힘들다고 한 적도 없었다. 나를 예뻐해 주셨었다. 너무 배신감이 크다고 하셨다. 바로 인력충원이 안될 테니 2달만 더 근무하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죄송합니다. 벌써 3월이라. 공무원시험이라도 준비하려면 지금도 늦은 것 같습니다. 이번 달까지만 근무하겠습니다."


내가 '안 되겠다. 빨리 그만두고 다른 길을 찾아봐야겠다.' 생각했던 타이밍은 그때였다.

내가 평생 열심히 일해서 경쟁을 뚫고 올라가도 수간호사가 되는 것일 텐데.

수간호사 자리가 전혀 부럽지가 않았다.

지금 액팅을 하는 나보다, 민원을 더 받는 자리였다.

수간호사선생님은 대표 민원 처리반이었다.


어쩌면.. 그때 내가 내적으로 조금 더 단단했다면,

1년만 더 근무해서 모든 일이 익숙해졌다면,

평생직장으로 잘 지냈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도 생각한다.

기억이 많이 미화된 것이겠지만, 좋은 직업이었다.


어쨌든, 그때는 어렸고, 14개월을 근무하고 나는 퇴사했다.

(그리고 그때의 결정을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이제, 뭐해먹고살아야 되나?


그만둔 후에야 고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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