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인칭관찰자 Oct 31. 2020

'내 보물 1호'를 읽고

독후감

어릴 적부터 평범한 사람들의 수기(手記) 읽기를 참 좋아했다. 한 번씩 그런 수기모음집이 내 손에 잡힐 때면, 책이 너덜너덜 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어느 글에서 밝혔던 나의 가장 소중한 재능, 감수성을 길러준 것은 동화책이나 위인전이 아니라 소년소녀가장 수기집이었다. 세월이 흘러 아직까지도 남 이야기 보고 듣기를 즐겨하고, 좋은 수기집을 구매할 때는 한 치의 망설임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나름 꽤 많은 수기를 읽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수기란 글이 전문적으로 글쓰기를 배운 분들의 작품은 아니라서 읽다 보면 패턴이 대동소이함을 느낀다. 물론 이 세상 사연들 중에 남과 같은 것이 어디 있겠냐만은, 또 우리는 늘 "사람 사는 거 별다를 것 없다"는 푸념 속에 살지 않는가. 가정 불화, 갑작스러운 죽음 혹은 부재, 병치레 같은 사연은 겪은 사람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큰 고통이겠지만, 그러한 사연을 여러 편 읽다 보면 때론 그런 일들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치부하는 잔혹함을 스스로에게 느끼기도 한다. 거기다 전문적으로 수필을 쓰는 작가들의 빼어난 글을 찾아 읽다 보니, 언제부턴가 수기에 큰 기대를 가지지 않았다.






 그날도 별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다. 일어나 침구류를 정리하고, 책상에 앉아 잡지 '좋은 생각'을 펼쳤다. 늘 그러했듯 오늘 날짜에 실린 글 두 편을 읽는데, 그중 한 독자의 수기를 읽다가 그만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일렁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글을 다 읽고도 한동안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그렇게 눈물을 한 바가지 쏟고서, 다소 진정이 된 후 나는 왜 이 글에 그토록 깊은 울림을 느꼈는지 찬찬히 기록했다. 못난 내 글을 변함없이 아껴주는 친우(親友) 그리고 독자들께 내가 느꼈던 그 감정을 함께 나누고 싶어 이 글을 싣는다.


제목: 내 보물 1호


어린 나는 내가 열 살 때 집을 나간 엄마와 매일 같이 통화했다. 매번 "엄마, 사랑해."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한 번은 아빠가 물었다.

"왜 엄마한테만 사랑한다고 해?"

나는 대답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하루는 학교에서 부모님에게 부칠 편지를 쓰라고 했다. 엄마가 사는 곳 주소를 몰라 아빠에게 썼다. 며칠 뒤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니 아빠가 치킨을 세 마리나 시켜 놓고 나를 기다렸다. 내가 보낸 편지를 읽고 기분이 좋아져 시킨 것이다. 우리 집은 시골이라 세 마리 이상 주문해야 배달을 해줬다.

'엄마 주소를 몰라서 아빠한테 쓴 건데...... 이렇게 기뻐할 줄 알았으면 진작 쓸걸.'

그날 옆집 할머니와 언니까지 불러 치킨을 배불리 먹었다.


중학교에 올라간 뒤로 나는 엄마와 살았다. 건강이 좋지 않아 쉬던 아빠가 다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아빠가 물었다.

"아빠 이제 돈 버는데 갖고 싶은 거 있어?"
"나 휴대전화 바꾸고 싶어!"
 "그래. 조금만 기다려."


평소처럼 학원 차에 몸을 실은 어느 날, 할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가 심장 마비로 쓰러졌단다. 아빠는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유품으로 받은 아빠의 점퍼 안주머니에는 내 편지가 들었다. 나는 아빠 묘지 앞에 편지를 묻었다.


아빠의 휴대전화를 열어 보았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이쁜 딸'이라는 문구와 내 사진이 배경 화면이었다. 음성 메모함에는 통화 녹음 파일이 몇 개 있었다. 실수로 녹음된, 이제 들을 수 없는 아빠의 목소리를 들으며 펑펑 울었다. 그날부터 아빠의 휴대전화는 내 보물 1호가 되었다.


아빠가 사무치게 그리운 날이면 휴대전화 속 녹음 파일을 듣는다. 아빠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도 따라 웃고 운다.


이루리 님 / 서울시 강북구 / 잡지 '좋은 생각' 10월호에서 인용


이 글을 읽고 여러분들은 어떤 감정을 느끼셨는지. 나처럼 눈물을 쏟으셨을까? 아니면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셨을까?


내가 여타 수기와 이 글이 다르다고 느꼈던 점은 "미움과 원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글 속에 담긴 작가의 어릴 적 상황은 이러하다.


1. 엄마가 집을 나갔다.

2. 그런 엄마와 매일 전화를 했다.

3. 그 사실을 함께 사는 아빠가 알고 있다.


이런 경우, 대체로 엄마가 집을 나가야 했던 이유와 원인을 제공한 이에 대한 원망을 기록하기 마련이다. 아빠와의 불화 또는 가정 폭력 같은 이유라면 아빠에 대한 미움이, 가난이 싫어서, 사는 게 힘들어서 나갔다면, 어린 자식을 두고 무책임하게 떠난 엄마에 대한 원망이 언급된다. 그런데 이 사연의 주인공은 떠난 엄마도, 남겨진 아빠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거기다 아빠는 또 어떠한가. 딸이 집 나간 아내와 매일 통화를 하는 사실을 알면서도 화를 내지 않는다. 되려 "왜 엄마한테만 사랑한다고 해?"라며 귀여운 투정을 부린다. 아빠 역시 떠난 아내와 그녀에게만 애정을 표현하는 딸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 첫 문단을 읽을 때부터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이 시큰해지기 시작했다.



중학교 입학 후에는 글쓴이가 아빠를 떠나 엄마와 함께 살게 된다. 이런 보호자의 변화는 그리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아빠가 자식을 좋지 못한 환경에서 키우다 보면, 참다못한 엄마가 찾아와 자식에게 의사를 묻거나, 때로는 구출하듯이 데려가 함께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 글에는 그러한 과정이 없었다. 어디를 찾아봐도 자식을 두고 벌이는 쟁탈전이 없다. 아내는 딸을 데려오면서 남편을 비난하지 않았고, 남편은 딸을 빼앗기지 않으려 떼쓰지 않았다. 아빠는 자신을 떠난 딸에게 가시 돋친 원망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이제 일을 시작했으니 사고 싶은 것을 말하라고 한다.  


글쓴이와 그녀의 가족에게는 분명 지면에 모두 담을 수 없었던 큰 아픔이 있었을 것이다. 사랑했던 부부가 갈라서고, 자식이 곁을 떠나며, 끝내 세 식구가 함께 살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픔이 없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 글에는 그 아픔의 이유가 되는 미움과 분노, 갈등과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다. 되려 그 지점에 서로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 이해와 배려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착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남긴 고운 말과 애틋한 행동에서 나는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꼈고, 그 아름다움의 깊이만큼 이 가족의 가슴 아픈 운명에 슬펐다. 그래서 아침부터 두 눈이 팅팅 붓도록 울고 말았던 것이다.





모든 드라마의 기본은 갈등이다.
- 사이드 필드



난 이제껏 갈등과 대립이 없는 글은 좋은 글이 아니라 여겼다. 그러한 글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고, 흥미를 유발하지 못한다고 믿었다. 픽사의 명작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에서 그리 말하지 않았나.


기쁨이 가치가 있는 것은 그만큼의 슬픔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모든 글에는 당연히 대립과 갈등이 존재하고, 누군가를 향한 깊은 원망과 미움도 적지 않게 담겨있다. 결말이 결국 내가 행복했거나, 기뻤다 한들 그것은 슬픔과 시련을 극복했기 때문이고, 그러한 것들의 원인은 내가 되었든, 내 주변인이 되었든, 이 사회가 되었든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난  내 행복과 기쁨을 포장하기 위해 서라도 당연히 그 것들을 언급했다.


그러나 나는 저 글을 통해 깨달았다.

미움과 갈등은 여백에 남겨두고, 사랑과 감사로 오롯이 채우는 글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말이다.


그래. 좋아하기에도 너무 짧은 인생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지구부터 바라봐야 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