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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라 Sep 05. 2021

빨간 도깨비

수필인듯 수필아닌 소설같은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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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기에 살짝 젖은 양상추를 손으로 뜯는다. 그리고 치커리와 겨자 잎을 적당한 크기로 썬다. 국내에선 자라지도 않는다는 붉은 채소 라디치오를 서걱서걱 도마에 힘주어 썰고나면 빛깔 좋은 사과들로 얇게 잘라 모양을 낸다. 그는 멕시칸 치즈를 샐러드에 올리고 아몬드가루를 맛깔스럽게 흩뿌린다. DM이가 이탈리안 파스타집에서 요리를 배운지도 일곱 달이 넘었다. 남들은 끽 해야 한두 달 넘기고 뜬다는 레스토랑에서 말단생활이 제법 익숙한 듯 DM의 손발이 척척 움직였다.       


일은 좀 할 만하냐고 DM에게 물어보면 ‘주방이 단지 아주 뜨거울 뿐’이라고 말했다. 왠지 그 말은 ‘일본이 아주 뜨거운 곳이었다.’고 말하던 때와 닮아 있었다. 우리가 같은 공간에서 같이 자고, 혼나고, 빨래를 하며, 삽질을 했던 때. 힘들 때마다 DM과 나는 언제나 ‘밖에 나가기만 하면’이란 주제로 무한 상상의 날개를 펼쳤다. 상상은 부대 담장을 넘어 치킨, 탕수육, 피자냄새가 머무는 곳에 들르기도 했고 영화관과 오락실에서 노닥거리는 일도 잊지 않았다. 뱃속 깊은 곳에서 살아 숨 쉬는 그리운 맛 이야기와 갓 머리 깎은 동자승이 속세를 그리워하듯이 배고픈 배와 그리움은 마치 깨진 독에 물 채우듯 끝없는 이야기들로 위안 삼곤 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할 때면 DM의 날개는 좀 더 나아가 일본까지 날아갔다 오곤 했다.     



어느 날 일본으로 훌쩍 떠나버린 자신의 엄마를 두고 ‘어디에 떨어뜨려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며 DM은 말했다. 입대 날 부모님 없이 제 발로 보충대에 찾아가야했고 남들이 군복무기간 중 두어 번은 찾아온다는 면회, 외박 한 번 없었지만. 건너나라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만족할 줄 알았고 되려 자기걱정은 말라며 수화기를 꼭 붙잡는 그였다. 항상 전화연결이 되었던 것도 아니었고 여행객 아닌 신분으로 일하시는 엄마에 대한 걱정은 이년 내내 계속되었다. 그 때 일본은 아주 뜨겁고 더운 나라라며 DM은 내게 수화기너머의 이야기를 말해주었다. 아주 더워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고생을 사서하는 일일 것이라고 했다.      

부대에 나와서도 DM의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엄마는 일본에 있었고 집에는 그간 밀린 청구서가 우편함 빽빽이 박혀 있기만 했으니까. 일본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 쓰나미가 덮쳐도 어느 곳에 떨어졌는지도 모를 엄마의 소식을 듣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우리들이 누누이 꿈꿔왔던 울타리 밖의 세상에서도 여전히 울타리는 존재했다.     


DM이가 이 뜨거운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일본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순전히 내 탓이었다. ‘주방에서 요리를 할 친구를 소개해줄 수 있냐’며 예전에 일했던 가게 사장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날. 왜 그때 DM이가 생각났던 것일까. 부대에서 요리하는 모습 한 번 본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DM은 그 때부터 레스토랑에서 일했다.        

차가운 샐러드를 만들고 파스타면을 삶고 피자와 나시고랭같은 볶음밥도 만든다. 아홉시부터 밤 열시까지 일하는 친구를 볼 때면 나는 괴로운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힘든 군복무를 하면서 밖에 나가서는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자고 상상했던 그에게 잘 포장된 일폭탄을 던져준게 아니었을까.     

며칠 전 가게에 찾아갔더니 DM은 빨간 도깨비가 되어 있었다. 뜨거운 불이 얼굴에 익다 못해 불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도깨비 방망이 대신 후라이펜을 다루며 마법의 가루 대신 아몬드가루를 뿌리는 모습을 보면서 뜨거운 불을 다루는 도깨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주방이 늘 뜨겁다는 도깨비는 뜨겁다는 일본을 생각한다. 같이 살았던 친구를 내가 빨간 도깨비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2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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