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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키거 Sep 27. 2024

산티아고 대성당 지붕에서 맞이하는 마흔 번째 생일

산티아고에서 특별한 생일 맞기

생일을 산티아고에서 보내다니

 아침에 일어나서도 실감이 안 난다. 오늘부터 나는 더 이상 삼십 대가 아닌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십 대가 되었다. 그것도 산티아고에서 말이다. 이제 길거리에서 만나는 아이들에게 아줌마 소리를 들어도 기분 나쁘지 않아야 할 찐 중년의 나이대에 들어섰다는 게 아직은 믿기 힘들지만 그래도 재밌는 모험들이 또 가득할 것 같아 한편으로 기대도 된다.

 산티아고에서 맞이하는 생일 아침식사는 작년에 순례길 끝낸 후 언니와 함께 했던 카페 Ratinos에서 플랫화이트에 애플파이로 골랐다. 이 근방에서는 맛있는 커피로 평점이 가장 높기에 고민 없이 선택했고 여전히 맛있는데 커피에 진심인 이탈리안 신랑은 자기가 시킨 카푸치노가 라떼에 가깝다며 눈썹을 치켜올린다. 그러게 무난하게 에스프레소로 가지 평소 시키지도 않던 카푸치노를 시키고 그랴. 내 생일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어서 나 행복하게 시작했으면 된 거다.


카페 Ratinos

 

 식사 후에는 바로 앞에 있는 큰 기념품 샵에서 조개모양 반지를 샀다. 실은 작년에 정확히 이곳에서 언니와 같은 반지를 맞췄는데 그게 생각보다 큰 사이즈를 사서 낄 때마다 빠질까 염려가 되더라고. 언니는 두 번째 손가락에 끼고 묵주 돌리듯 돌릴 수 있어야 한다고 넉넉한 사이즈가 괜찮다 하지만 난 기도 목적으로 산 것은 아니기에 여기 온 김에 두 사이즈 낮춰 딱 맞는 반지로 새로 샀다. 언니와 함께 산 반지는 나이가 더 들고 손마디가 굵어지면 그때 끼면 되니 잘 보관해야지.

 이 반지는 꼭 산티아고에 다시 돌아와서 사고 싶었는데 얼떨결에 1년 뒤 이곳에 다시 있다니 인생 참 재밌다. 문어의 도시 멜리데를 지날 때 언니가 사준 조개 반지도 좀 커서 비슷한 모양으로 이곳에서 하나 더 샀는데 아니 왜 작년 순례길에서 이렇게 넉넉한 반지들을 산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손이 부어있었나? 여하튼 늘 하고 싶었는데 빠질까 조심스러웠던 조개 반지들을 꼭 맞는 걸로 새로 사서 껴보니 내가 걸었던 순례길을 가까이 기억할 수 있는 특별한 매개체를 마련한 것 같아 든든하다.


기념품 샵 Elliphone과 이곳에서 산 새로운 조개 반지


 내가 반지를 산 이 기념품샵은 중국인이 운영하는 곳으로 내가 산티아고에서 들린 많은 샵들 중에서도 반지 종류가 많고, 사이즈도 다양해서 다시 찾게 된 곳이었다. 주인인 중국인 여성분이 빠르고 친절하게 이것저것 착용해 볼 수 있게 도와주셔서 기분 좋게 반지를 고를 수 있었다. 사실 작년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시작하기 전부터 조개 반지 하나를 꼭 사야지 마음먹었지만, 의외로 순례길 여정 중 반지를 파는 곳은 많이 없었고 예쁜 것은 더더욱 없어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반지를 구매할 계획이라면 산티아고가 선택의 폭이 훨씬 넓다는 걸 기억해 두면 좋겠다. 여긴 Elliphone이라는 가게인데 구글에는 핸드폰샵으로 등록이 되어있고 사진이 업데이트가 안된 예전 것이지만 직접 가보면 기념품 종류도 많고 반지는 12유로에서 18유로 (1만 8천 원에서 2만 7천 원 사이) 정도에 구입할 수 있다. 새로운 반지를 끼고 나니 괜스레 순례길을 걸었던 그때 기분이 좀 나는 듯하다. 이런 게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지 싶다.


산티아고 성인의 어깨를 만지러 가는 길
야고보의 어깨를 만지러 올라가는 길, 성당 한가운데 보이는 저 야고보의 동상 뒤로 올라가는 거다


 식사를 하고 내 작은 기쁨인 여러 기념품 샵들을 기웃거리며 한가한 오전 시간을 보내다 신랑과 성당 안에 들어가기 위한 줄에 합류하였다. 여기까지 와서 신랑과 함께 내 생일에 향로 미사를 드리면 특별할 것 같았지만 수많은 순례자들과 독실한 가톨릭들이 메운 길고 긴 줄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한가한 시간을 골라 산티아고 성인 동상의 어깨를 만지고 교회로 입장하는 경험 정도만을 가져가기로 했다.

 그렇게 적당히 길었던 줄을 20여분 정도 기다려 먼저 대성당 한가운데 만들어진 야고보 동상의 어깨를 만지며 각자의 소원을 빌고 내려왔다. 야고보의 어깨를 만지며 소원을 비는 전통은 순례자들이 산티아고까지의 긴 여정을 마친 후, 감사와 축복을 기원하는 의미가 더 짙은데 나를 포함한 많은 순례자들이 이 순간에 소원을 빌거나,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올리곤 한다. 사진촬영이 안 되는 성당 안의 유일한 두 곳이 바로 이곳과 야고보가 안치된 관이 있는 곳인데 더 빠른 흐름으로  많은 순례자들에게 기회를 주고, 야고보의 시신 또한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한 방침이기에 기꺼이 받아들여지는 부분이다. 작년에 여기 도착해서 야고보의 어깨를 만지면 ‘무사히 잘 도착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감사함을 전했는데 이번에는 내 생일이기도 하니 염치없지만 작은 소원하나 빌어보았다. 이루어지고 말고를 떠나 마흔 번째 생일에 이렇게 특별한 의식을 할 수 있음에 새삼스레 감사해지는 그런 순간이었다.


못 말리는 타파스 중독

 생일 점심으로 또 평이 기가 막히게 뛰어난 타파스 바를 하나 찾아갔다. 어제 하루 타파스를 두 번이나 먹었지만 아직도 그 여운이 안 가셨다. 신랑이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해 두었는데 나는 한정된 코스요리보다 고르는 재미가 큰 타파스를 함께 한번 더 먹고 싶었고, 정성은 너무 고맙지만 새로운 타파스 바에 가도 되겠냐고 물어봐 결정한 곳이 Antollos pinchos e viños였다. 오늘은 이런 평범한 게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그런 날이다.


Antollos pinchos e viños의 타파스

 

 그런데 여기 입장하자마자 너무 재밌다.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데 서버가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는 거 아닌가? 그리고 손님들이 접시를 가지고 바에서 자꾸 타파스를 말없이 집어간다. 슬쩍 물어보니 옆에 준비된 접시를 들고 내가 손으로 원하는 걸 집어다가 먹으면 된다고 한다. 이런 곳은 난생처음이다! 그럼 내가 뭘 먹었는지 어떻게 알고 나중에 계산을 할까 의아해하니 먹고 남긴 꼬치의 개수와 모양으로 계산한다고 한다. 아 너무 재밌다.

 보통은 타파스 바에 앉아서 이거요, 저거요 서버가 가져다줄 때까지 기다리는데 여긴 꼭 노포에서 먹는 듯한 기분에 정이 많이 간다. 게다가 음식 가짓수도 정말 많은데 내가 좋아하는 치즈가 올라간 것들, 하몽이나 연어로 말아 속을 채운 롤들도 많다. 우리 신랑 평으로는 심플하고 본연의 맛에 더 집중한 클래식한 타파스보다 조금 더 퓨전에 가까운 크리미 하고 믹스된 종류의 타파스들이 많고 소스들이 많이 올라간 것 같다 한다.

 근데 말이야 여기 완전 내 스타일이었어. 약간 고급진 퓨전 앙트레 먹는 그런 느낌이었지 뭐야. 띤또 데 베라노에 타파스 한 대여섯 개를 먹으니 배가 부르다.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우아한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보다 이런 식사가 더 나 같았다. 신랑은 저녁에라도 레스토랑에서 제대로 된 생일 식사를 하자고 하지만 난 너무 배가 불러서 저녁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은 정도였다. 하고 싶은 일, 먹고 싶은 걸 먹는 생일은 이미 그 자체로 특별하다.


산티아고 대성당 지붕 투어
산티아고 대성당 지붕과 높았던 돌계단

 

 산티아고가 어제와 다르게 온도도 많이 떨어지고 추워져서 급하게 긴바지와 도톰한 청남방을 사입은 뒤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산티아고 대성당 지붕 투어를 하러 갔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게 있는지 꿈에도 몰랐는데 와 산티아고에서 해야 하는 게 은근히 많은 것 같다. 이런 게 있는 줄 알았으면 언니와 진작에 올라갔을 텐데 말이야.

 지붕을 올라갈 수 있는 투어는 가이드와 함께 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가이드는 오직 스페인어로 진행된다. 올라가는 계단이 생각보다 단차가 높아서 ‘오 이거 나이 드신 분들이나 다리 다치신 순례자들한테는 조금 힘들겠는데?’ 생각이 들 정도. 약 70개의 높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탁 트인 지붕에서 약 4군데의 스팟에서 이런저런 설명(물론 스페인어로)이 이어지는데 생각보다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뭐라도 주어 들을까 신경 쓰다 보니 사진 찍을 시간이 빠듯했다.

 가이드가 끝나고 다시 70개의 계단을 올라 드디어 올라간 탑에서 내려다본 산티아고 마을 전경과 오브라도이로 광장이 아기자기하고 예쁘기만 하다. 아직도 저 멀리 순례자들이 도착하고 있는데 뭔가 아련하기까지 하다.

   

탑에서 보는 산티아고 대성당의 뒷모습과  오브라도이로 광장


 오늘 날씨가 갑자기 흐려져서 쨍하게 쏟아지는 햇살 밑에서 인생샷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내 생일에 대성당 안에 들어가 신랑과 함께 야고보동상의 어깨도 만지고, 향로 구경도 하고, 이렇게 대성당 지붕과 탑 위에서 산티아고를 내려다보는 새로운 경험을 하다니 아마 잊지 못할 생일이 될 것 같다. 날씨 좋은 날 다시 한번 오고 싶은 그런 곳.

 그나저나 최소한 하루 한 번 정도라도 영어 투어를 해준다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 아니면 한국어를 포함한 가이드에 대한 정보 브로셔나 오디오 가이드라도… 너무 멋진 투어이기에 설명이 곁들여진다면 정말 유명한 투어가 될 것 같아서 너무너무 아쉬운 마음에 계속 중얼거리게 된다.

 그래도 어쩌다가 알게 된 지붕투어도 해보고 나의 마흔, 불혹은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먹고 싶은 거 다 먹는 이렇게 자유로운 영혼처럼 시작한다. 앞으로의 사십 대가 지금처럼 하고 싶은 거, 이루고 싶은 거 하나씩 차근차근 이렇게 즐기며 이뤄나가는 그런 즐거운 나잇대가 되길 간절히 희망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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