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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키거 Sep 26. 2024

웰컴 투 산티아고

일 년 만에 돌아온 산티아고

조금만 기다려, 달려가고 있어

 비행기 창밖의 풍경은 늘 비슷하지만, 오늘은 자꾸만 시선이 밖으로 간다. 평소에 잘 찍지 않던 창문 사진까지 찍으며, 마치 오랜만에 보고 싶던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처럼, 산티아고를 향해 가는 시간이 설레고 흥분된다. 드디어 산티아고에 가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 공항 갈 준비를 하는데 기분이 흡사 순례길 걸으러 떠나던 그날의 느낌이 났다. 작년 순례길 이후에도 베를린, 파리, 말타, 더블린, 비엔나 등 많은 곳을 여행 다니며 자주 비행기를 탔지만 오늘의 비행은 그 어느 때보다 설렘으로 가득했다.


이탈리아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직항은 라이언에어가 있다

 

 새로 보기 시작한 디즈니플러스의 드라마 더 베어(The bear)를 몇 편 보고 나니 어느새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요리사 이야기인 더 베어 주인공들의 연기가 너무 좋아서 확 몰입되는 게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이탈리아에서 산티아고까지 비행시간은 약 2시간 50분 정도로 힘들지 않은 딱 적당한 거리다. 라이언에어 덕분에 이탈리아에서 직항으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할 수 있다니 이탈리아는 허울뿐인 국영 항공사보다 라이언에어가 사람들을 세상으로 연결해 주는 실질적인 집행자 역할을 해준다. 정말 라이언에어 없었으면 어쩔뻔했나 몰라. 유럽에서 유럽 가는 비행은 무조건 라이언에어가 답이다.

 별 탈 없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해 공항을 둘러보니 작년에 여기 있었던 향수가 그대로 떠오른다. 아, 내가 드디어 이곳에 다시 왔다!


산티아고 대성당권 호텔 추천
Hotel Plaza Obradoiro
산티아고 공항과 1유로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는 사람들

 

 분명 어디선가 산티아고 시내로 들어가는 공항버스가 1유로라고 했는데 줄도 길고 짐도 있어서 바로 택시를 타기로 결정했다. 버스를 타면 시내 중간에서 내려줄 텐데 캐리어를 끌고 산티아고 내 돌길을 걸어 이동할 생각을 하니 이리저리 택시가 날 것 같았다. 20분 남짓인 여정은 공항 정액제로 23유로(한화 3만 4천 원)로 유럽 내 물가치고는 크게 나쁘지 않은 가격이었다. 공항 밖에서 순례자 가방을 메고 있는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꼭 동창 같고, 동기 같은 게 나도 모르게 깊은 동질감을 느끼는 내 마음은 벌써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 어딘가에서 이들과 함께 걸을 것만 같다.


산티아고 대성당 바로 앞에 있는  Hotel Plaza Obradoiro


 친절한 택시 기사님을 만나 오늘의 호텔 앞에 안전하게 도착을 했는데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이미 위치를 알아보고 선정한 호텔이지만 산티아고 대성당이 문자 그대로 코앞에 있었다. 뭔가 준비를 하고 맞이하고 싶었던 대성당이 그냥 바로 눈앞에 훅하고 들어와 버리니 당황스러웠다. 더 멋진 모습, 뭔가 성장한 모습으로 보고 싶은 예전 담임선생님의 얼굴을 길에서 갑작스레 마주친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나도 몰랐는데 다시 산티아고에 돌아왔을 때 조금은 더 성장한 모습이길 바라는 마음을 한구석에 품고 지난 일 년을 살아왔었나 보다. 내가 순례길을 마치고 길의 끝에서 만난 성당을 보며 안도감과 완주했다는 감사함에 울었던 그 눈물의 값어치를 하고 살려고 다짐했었던 거였겠지. 그런데 지난 일 년 마음의 변화는 있었어도 내 행동은 크게 바뀐 게 없어서 오늘 조금 부끄러웠다고 할까. 대성당 앞에서 내가 한 줄도 몰랐던 각오가 떠오르며 큰 성취 없이 보낸 지난 일 년을 셀프 반성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뭐지, 단단히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산티아고 대성당이 나한테 자꾸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대성당과의 대화는 나중에 더 하기로 하고 오늘부터 신랑과 이틀을 묵을 Hotel Plaza Obradoiro에 체크인을 했다. 일단 위치는 백점을 줄 수 있을 정도로 호텔 문만 나서면 성당이 바로 있어 너무 좋았다. 9월 초가 비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박 당 110유로(한화 16만 4천 원)에 예약했으니 산티아고 구시가지 치고 정말 알차게 잘 예약한거다. 나중에 10월 초에 지인을 위해 이곳을 추천했는데 숙소비가 두 배 이상 뛰어서 차마 예약을 하진 못했다. 여하튼 다시 산티아고에 돌아온다면 꼭 다시 묵고 싶은 숙소다. 어메니티들도 잘 갖춰져 있고, 공간도 널찍하고 침구나 수건도 고급져서 쾌적하게 사용했다. 리모델링을 한 건지 디자인이나 가구들이 다 모던하고 새 거여서 깨끗한 것도 좋은 이미지에 한몫했다. 누가 산티아고 호텔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작년에 묵었던 Atia와 여기 두 곳 다 강력 추천할 것 같다. 스태프들도 하나같이 친절하니 혹시 산티아고에 여행으로 묵을 계획이 있으신 분들 Hotel Plaza Obradoiro도 살펴보시기 바란다. 큰 기대 안 하고 그저 위치랑 평점 잘 살펴서 고른 호텔이 마음에 드니 시작부터 기분이 좋다. 산티아고 초짜인 신랑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산티아고를 소개해주고 싶어 짐만 두고 밖으로 나가본다. 그렇다. 내가 입이 마르게 칭찬하던 내 친구 산티아고를 신랑에게 소개해 줄 시간이다.


타파스 왜 이렇게 재밌는 거야
안녕 오랜만이야

 

 호텔 바로 앞이 산티아고 대성당이라 가장 먼저 신랑과 함께 사진을 찍은 후 바로 식사를 하러 갔다. 산티아고의 한식당 누마루에서 밥 맛있게 먹자 해서 아침에 카푸치노에 코르네또 하나 먹은 게 다인 배고픈 배부터 채워주기로 했는데 아쉽게도 우리가 있는 일요일, 월요일이 딱 누마루의 휴일이다. 내가 못 먹는 건 둘째치고 우리 신랑에게 그 맛있는 한식을 못 먹여주는 게 정말 아쉽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이건 신랑이랑 다시 한번 산티아고에 와야 하는 뜻이라고 생각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이번에는 스페인다운 음식을 먹으러 갔다.


 타파스 바 Petiscos Do Cardeal


 구글 평점 4.5의 타파스 바 Petiscos Do cardeal은  내가 너무 오랜만에 타파스를 먹으러 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고르는 재미, 먹는 재미가 넘치는 곳이었다. 나름 향수에 빠져 빤꼰토마테에 파드론 페퍼도 한 그릇 시키고 이것저것 더해 한 상 차려놓은 뒤 띤또 데 베라노 한 모금을 넘기는 그 순간! ‘내가 지금 스페인에 있구나!’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탈리에서도, 또 여러 세계를 돌아다니면서도 맛있는 식사는 참 많았는데 오늘처럼 재밌는 식사는 생각보다 드물었다.

 타파스는 내 입맛 당기는 대로 이것저것 골라먹는 재미가 정말 쏠쏠하다. 오래간만에 타파스 바에 오니 너무 재밌고 맛있어서 결국에 저녁도 또 다른 타파스 바에 갔다는 사실. 우리 착한 신랑은 내 생일을 위해 우리가 여기 있는 거니 뭐든지 나 맛있으면 된 거라며 하루 두 번 연달아 타파스 집을 가며 신난 나를 보며 그저 웃는다.


저녁에 들린 A Taberna do Bispo


저녁에는 끌라라를 한잔 시켜 타파스들과 함께했다. 띤또 데 베라노와 끌라라는 여자여자한 칵테일 같아서 스페인에서 내가 즐기기 딱인 가볍고 맛있는 최고의 술이다. 점심만큼이나 저녁에 먹은 타파스 바 A Taberna do Bispo의 분위기와 음식 모두 좋았다.


꼬마 기차 이건 안 타셔도 될 것 같아요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산티아고 관광 꼬마 기차

 

 오늘 작년에 미처 못 탄 관광용 작은 기차도 탔는데 솔직히 난 이거 반댈세. 6유로(한화 9천 원)에 45분 동안 시내를 운행하는 열차인데 영어 오디오도 지원돼서 탔건만 정작 중요한 산티아고 안은 안 돌고 저 멀리 바깥의 산티아고 대학교 캠퍼스 위주로 돈다. 신랑이나 나나 이거 대학교 탐방 홍보 차량 아니냐고 그럴 거면 무료여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할 정도로 대학교 건물들 보여주고 딱히 유익한 건 없었다. 그냥 시간이 많고 날씨 좋은 날 기차로 45분 나들이한다 생각하고 타기에도 가격대비 추천 안 한다네. 정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오디오 정보도 많이 제공되지 않고 그리 중요한 포인트들을 많이 지나지 않기 때문에 안 타셔도 산티아고에서 놓치시는 부분 없을 실 것 같다.


그렇게 재회한 산티아고

 아침에 비행기도 타고 왔고 짐도 풀고 뭐 먹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갔다. 오갈 때 기념품 샵들은 또 얼마나 많이 기웃거렸는지 아직도 내게는 작년 순례길의 여운이 깊이 남아있는 것 같다.

 그래, 돌아오니 참 좋다. 그런데 조금 씁쓸하다고 할까? 신랑이 산티아고를 다시 보니 어떻냐고 묻는 질문에 꼭 대학교 졸업생이 모교 찾은 느낌, 그들의 졸업식을 옆에서 지켜보는 심정이라고 말했다. 성당 앞에서 마음껏 즐거워하는 순례자들의 영광이 지금의 내것은 아니니까. 내 과거의 성취와 영광은 말 그대로 과거고 그곳에 머무르는 게 맞다고 생각되었다. 이곳 산티아고를 스쳐가는 수백, 수천만명의 사람 중 난 그저 한 사람으로서 영광은 가슴에 남겨두고 이제 새로운 순례자들을 위해 박수를 쳐줄 차례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웃음을 옆에서 지켜보며 저게 어떤 느낌이었지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지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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